‘햇살’을 머금고 사는 그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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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23면

‘헤르만 하우스’에 있는 정원. 녹음이 우거지면 가든 파티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다.

전원에서 ‘햇살’ 하는 사람들

벼룩시장은 주변에도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한 단지 내 행사다.

‘헤르만 하우스’에 사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이 하나 있다. 이곳에 사는 것을 ‘햇살 한다’고 표현하는 것.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내내 충분한 햇빛을 받으며 아이들은 공동 정원에서 뛰어놀고 어른들은 주말이면 음식 한 가지씩을 가지고 나와 파티를 연다. 조그만 정원이지만, 나무를 심고 꽃씨를 뿌려 정원을 단장하는 집도 많다. 인근에는 심학산이 있어 아파트에서만 살다 온, 얼굴 하얗던 주부들도 씩씩하게 등산을 즐긴다. 자연이 가까이 있고 이웃이 정겨워, 사는 게 행복하다는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햇살’이라고 이름지었다.

이층에 꾸며진 어린이 방. 단지 내 일부 집은 천장에 창문을 내 밤하늘의 별을 세다가 잠이 들 수 있다.

전용 정원과 주차장을 갖춘 2층짜리 전원주택 ‘헤르만 하우스’는 유럽ㆍ미국에서나 볼 수 있는 타운하우스라는 이유 때문에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 내에 위치해 전원생활을 즐기며 도시 공동생활의 편리함도 누릴 수 있는 곳. ‘도시형 전원 마을’이자 새로운 주거 형태라 눈길을 끌었다. TV CF와 뮤직비디오 등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영상도 많다. 그러나 이곳은 부동산 기사에만 등장하거나,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곳이다. 문을 두드리고 이곳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게 진정으로 ‘헤르만’을 아는 방법이다. 은회색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 137가구. 벽을 맞대고 살며 피붙이같이 정을 나누고 있다. 남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던 그 옛날, 골목길 이웃집들이 바로 이곳 사람들의 삶이다. 내 집 문턱이 낮아졌다고 푸념하는 이들은 없다. 오히려 낮에 만나는 것도 모자라 인터넷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 인터넷 카페에서 이들은 누구의 아빠ㆍ엄마로 불리지 않는다. 지니ㆍ엠마ㆍ봉봉 등 아이디를 사용한다. 일상에서도 그들은 이름 대신 아이디로 서로를 부른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 카페에서 ‘파왕 DJ’가 올려놓은 음악을 감상하고, 전시회와 음악회 정보를 주고받는다.

지하층이긴 하지만 정원으로 연결되는 대형 창문이 있어 실내가 밝다. AV시스템을 갖춰 영화 감상을 위한 공간으로 꾸미거나 서재로 이용한다.

이런 따뜻한 커뮤니티가 있기에 아이들의 학교 성적, 오르는 아파트값, 남편의 연봉을 주제로 삼지 않아도 수다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일상이 따분하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오늘은 뭘 할까?”라는 호기심으로 아침을 열게 마련이다.

이층까지 통하는 높은 천장 덕에 거실이자 식당으로 이용되는 일층 공간은 시원스럽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창문을 통해 ‘햇살’이 가득 들어온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보내는 법

이곳의 사계절은 남다르다. 봄ㆍ여름ㆍ가을에는 ‘가든 파티’를 한다. 조명을 밝히고, 분수를 틀고 아이들은 물장구를 친다. 바비큐와 술이 빠질 수는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바비큐 그릴은 하나쯤 가지고 있다. 언제 자신의 집이 파티 장소가 될지 모르니 손님맞이를 위해서는 필수품이다. 새로 이사 오면 인사를 나눈다는 핑계로, 친해지면 정을 돈독히 하자며 만난다.

이곳 사람들은 의외로 서울에 직장을 둔 사람들이 많다.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주말만 되면 즐거운 생활이 있기에 서너 시간 출근길도 고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회사 회식’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와 동네 주민과 나누는 ‘헤르만 회식’에 참여하려고 열을 올린다.

봄은 이들에게 바쁜 계절이다. 정원을 가꾸고 꽃을 심느라 여념이 없다. 어디 화원이 좋은지, 그늘진 곳에는 어떤 나무가 좋은지 서로 정보를 준다. 한 집만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옆집과 조화를 이뤄가며 정원을 가꿔야 동네가 살기 때문이란다.
여름이 되면 숨막히는 낮 더위를 피했다가, 어스름 저녁이 되면 삼삼오오 모인다. 아빠들은 시원한 맥주 한잔을 나누며 피로를 풀고, 엄마들은 프로젝션과 홈시어터가 있는 한 집에 모여 영화를 보기도 한다.

가을은 가을대로 아이들에게 불그스름한 단풍의 아름다움과 지는 낙엽의 쓸쓸함을 알려주기 좋은 계절이다. 또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알아내 맛있는 먹거리를 공동 구매해 잔치를 벌이는 때이기도 하다. 파주의 이웃 농민에게서 쌀을 사고, 과수원 배를 사서 나눠 먹는다.

또 이곳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라고 해서 움츠러들지 않는다. 아빠와 아이들이 모여 나무로 썰매를 만든다.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으며, 아빠들이 더 신이 났던 지난겨울의 이벤트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과자집 만들기를 한다. 또 한 할아버지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이벤트까지 벌였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여는 ‘햇살 벼룩시장’이다. 주민들이 유아용품ㆍ아동복ㆍ장난감ㆍ책ㆍ음반 등 자신들이 쓰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을 물건들을 내놓는다. 집 앞마당에 자리를 펴고 아이건, 어른이건 물건을 파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들은 팀을 짜서 소시지ㆍ맥주ㆍ떡볶이ㆍ어묵을 만들어 파느라 비지땀을 흘려도 추억거리가 많아지니 신이 난다고 한다. 이 벼룩시장은 파주 출판단지 등 주변 동네 주민에게도 소문이 나 손님이 제법 많다.

자연과 함께 아이도 크고, 어른도 크는 법

이곳에는 특히 아이들이 많다. 학원 다니는 아이들도 많지 않다. 지난해 6월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입주민 대표 이경원씨는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면 ‘햇살’(헤르만)의 낮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라며 다른 곳보다 낮에 노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해줬다.

대신 주민들은 서로 품앗이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번역 일을 하는 이가 영어를 가르쳐주면, 또 다른 엄마는 비누와 천연화장품 만들기를 가르쳐준다. 놀이와 게임으로 수학을 가르쳐주는 이,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이, 동화책을 읽어주는 이. 이웃의 어른은 친구의 엄마이지만 언제든 선생님도 될 수 있다. 또 출판단지 안의 문화센터인 ‘꿈꾸는 교실’도 자주 이용한다. 책도 빌리고, 글짓기와 독서 지도를 받고, 어른들도 미술과 목공 일을 배운다. 출판단지와 헤이리에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행복이다. 출판단지에는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북 아웃렛이 있고, 중고책방이 있고, 도서관이 있다. 또 헤이리에 가면 음악실 카메라타가 있어 작은 공연을 볼 수도 있다. 최근에는 피아니스트 벤킴의 공연을 단체로 갔다고 한다. 파주 심학산의 해넘이 축제, 파주환경운동연합에서 여는 ‘생태 교실’도 아파트 단지에서는 꿈도 못 꿨을 경험이다.

이렇게 이곳 아이들은 자연을 벗하고, 사계절의 뚜렷함을 알아간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어른들도 파주시 농업기술센터가 주최하는 ‘정원 만들기’ 강좌를 챙겨 듣고, 아로마테라피 강사인 한 주민에게서 천연화장품과 비누ㆍ양초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심학산과 통일전망대를 함께 오르고, 곧 요가 강사를 초빙해 요가 강좌도 열려고 한다.
‘햇살’에 사는 사람들은 “뉴스를 보지 않고, TV를 보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준 이곳에서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웃이 얼마나 나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알게 됐다”며 “이곳은 느리고 천천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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