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7)제88화 형장의 빛 박삼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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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강도살인범을 돕는다고 주위로부터 원성과 질책도 많이 받았다. 피해자 가족들의 항의도 많이 받았다. 한 신문과 월간잡지에 최재만사건재판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와 구명운동에 관한 기사가 나가자 피해자의 노부모들은 나의 절로 찾아와 『아무 죄없이 죽은 피해자 가족들을 위해서도 일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때 차(다)를 들고온 사람이 바로 최재만의 부인이었으니 고통스러운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피해자가족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러나 최재만의 그 선행과 부처같은 모습이 나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나는 그를 다시 만나지 않을수 없었다.
88년2월26일 아침 배명인 전 법무장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 취임사면으로 살것 같습니다.』
2월26일은 최의 부인이 백일지장기도를 마치고 회향하는 날이었고 시아버지 제삿날이기도했다. 언제 형장으로 불려갈지 모르는 죽음같은 고통의 7년 삶이 광명을 찾던날 구명운동을 하면서 좌절과 고통을 많이 겪었던나는 뛸듯이 기뻤다. 눈물을 흘리는 노모를 모시고 구치소로 달려갔다. 노모에게 아들을 끌어안겨드리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담당교도관은 『최재만이가 살았다』고 펄펄 뛰며 기뻐했다. 사형수가 감형되는 날은 담당교도관이 누구보다 기쁜 눈물을 흘린다. 집행장에 데리고 가야할 교도관이니 그 기쁨은 짐작이 갈 만하다. 고금석(최와 고금석은 구치소안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의 집행때는 그렇게 넋을 놓았던 교도관이었다.
사형수 최재만은 88년3월1일 노태우대통령 취임특사로 무기로 감형되었다. 한국 행형사상 10여년만에 처음있는 일이었다.
최의 노모와 부인 김경심씨와 나는 배전장관을 찾았다. 감사의 큰절을 하는 노모를 일으켜 세운 배전장관은 『이젠 마음 한구석의 응어리가 풀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을 받을 정도로 큰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라며 겸손해했다. 서옹큰스님·구상시인, 그리고 언론사등 도움을 준 분들께 인사를 다녔다.
최재만은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어 열심히 기도하면서 목공예 기술을 익히고 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 대림사에 기증할 목탁과 염주를 만들기에 지금 그는 한창 바쁘다.
서옹스님·배명인전장관·구상시인, 그리고 나, 네명을 아버지로 맞이했다.
구상시인은 최에게 벼루까지 선물했고 『…그 애에게서가 아니라 내가/그 가슴에 꽃을 달 날이/내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있기를…』(「어버이날에 온 편지」중에) 라는 시를 써 최에 대한 애정을 쏟고있다.
최는 『그간 죽을 준비만 했는데 이젠 살 준비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팔염주를 4개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주라고 했는데 나는 그 염주를 최의 아내에게 하나, 배전장관에게 하나, 내가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그가 출소하는날 모두 합쳐서 그 가족에게 주기로 했다.
그의 가족들은 나의 절에서 7년을 있다가 올해초 친정에서 얻은 인천의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신의가 대단한 김경심씨는 행사때마다 참석, 소년소녀 가장들을 돕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중2, 국교5학년이 된 아들들은 하루바삐 네식구가 한자리에서 밥을 먹을 수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삭막한 이 시대에 사랑의 실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같은 이사건은 「법」과 「심판」에 앞서 「인정」이 우선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참 삶의 드라마였다.
최재만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배명인 전법무장관( 서 세번째)·서옹 전종정( 서 두번째)등이 88년3월 최씨의 감형소식을 접하고 한자리에 모여 기쁨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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