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고스톱 치다 룰 바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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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안, 원칙 깬 거잖아요"
측근 "강 대표에 뒤통수 맞아"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8일 강재섭 대표의 안에 대해 "기본 원칙이 무너졌고, 당헌.당규가 무너졌으며 민주주의 기본 원칙도 무너졌다"고 비판했다. 대전에서 열린 충청포럼에 참석해 기자들과 만나서다. '세 번의 원칙 붕괴'를 주장하는 박 전 대표가 가장 불만스러워 하는 대목은 일반국민의 투표율을 최저 67%로 보장해 이를 여론조사 비율에 반영한다는 항목이다. 이렇게 되면 '1인 1표'라는 표의 등가성이 무너진다는 주장이다. 박 전 대표의 발언 속엔 '강 대표 안 거부' 에 무게가 실렸다.

다음은 일문일답.

-중재안 중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나.

"민주주의 원칙은 표의 등가성에 있어요. 잘 났건 못 났건 나이든 사람이든 자기가 행사한 것은 한 표죠. 그런데 어떤 표는 두 표로 인정하는 것은 당헌.당규나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고 합의 원칙에도 어긋나죠."

-다른 불만은.

"고스톱 칠 줄 알죠? 이거 칠 때도 룰이 있어요. 한번 화투 치다가 중간에 룰 바꾸지 않는 거죠. 정치권도 원칙을 지키는 것을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정권 교체의 길인 거죠."

-거부하는 것으로 보면 되나.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그걸 받아들여야 할지."

-(거부로) 결정한 건가.

"그렇게만 얘기할게요."

박 전 대표는 강 대표의 안을 처음 듣고 "아, 그거 원칙 깬 거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날 첫 반응의 기조대로 말하고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고 "왜 저만 따라다니세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 들른 박 전 대표는 측근들에게 강 대표의 안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칙을 걸레로 만든다"고까지 하면서 강 대표를 압박했지만 "강 대표가 이를 고려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지적이 캠프 내에서 나왔다. 박 전 대표는 측근들에게 "어제와 달라진 게 없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측근은 "(중재안) 거부에 힘이 실린 것 같다"고 말했다.

◆김무성 "표 대결로 저지할 것"=캠프 관계자는 "믿었던 강 대표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했다. 캠프 내부에선 그만큼 강 대표의 안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하루 종일 대책을 숙의한 박근혜 캠프는 사실상 강 대표 안 거부 태세로 기울었다.

캠프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은 "강 대표의 중재안이 당안으로 확정되려면 당헌을 바꿔야 하고, 그러려면 최고위원회의와 상임 전국위원회 및 전국위원회에서 단계적으로 표결로 확정돼야 하는 만큼 각 단계에서 표 대결로 저지하겠다"고 저항 의지를 밝혔다.

유승민 의원도 "이 안의 비민주성을 국민에게 알리고 더 나아가 당내에서도 반대 운동을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 박 캠프가 중재안 거부를 공식화할 경우 두 캠프는 전국위원회에서 세 대결을 벌여야 한다. 박 캠프 측에서 강 대표 체제를 부정하며 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할 수도 있다.

대전=신용호 기자

"박측 반발? 거꾸로 아니오?
싸움 않으려 아침마다 다짐"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9일 충남 조치원 고려대 서창캠퍼스에서 열린 대전.충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발대식에 참석해 송태영 공보특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강정현 기자

9일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강재섭 중재안이 나온 지 8시간 만에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충남 연기군 고려대 서창캠퍼스 체육관에서 특강을 마친 그는 오후 6시30분쯤 즉석에서 기자간담회를 자청했다.

이 전 시장은 중재안 수용이 "당의 화합을 위해 혼자 내린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 전 시장의 기자간담회 내용과 그 이후 본지 기자와 따로 만나 나눈 일문일답식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중재안을 수용하나.

"캠프에선 민심 반영비율을 더 높여야 하니 내일 오전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난 일관되게 당 중재안을 존중한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뜻과 화합에 대한 당원들의 열망을 생각해 다소 불만스럽지만 혼자 결심해 받아들이기로 했다. 흩어진 당원들의 마음이 하나 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중재안은 마음에 드나.

"원칙적으로는 당심과 민심이 5대5가 돼야 했다. 상대 당 후보는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로 뽑힌 '국민 후보'라고 주장할 텐데 우리는 당원들이 뽑은 '당원 후보'면 되겠나. 유불리를 떠나 본선에 대한 걱정을 한 것이다."

-언제 결정했나.

"고민 많이 했다. 내일까지 결정을 미루면 국민은 밤새 걱정할 것이고, 당원들은 또 얼마나 혼란스럽겠나. 난 요즘 벌써 두 번이나 크게 고민했다(웃음). 지난번 강 대표 퇴진론이 나왔을 때도 그렇고…."

-박 전 대표는 결국 받아들일까. .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 당의 결정인데 결국 받아들이지 않겠나. 안 받아들이면 다른 방법이 있나."

-강 대표가 중재안 발표시기를 앞당겼는데 사전에 알았나.

"정말 몰랐다. 깜짝 놀랐다. 박 전 대표의 공격이 거세지니 더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해 빨리 한 것 아니겠나. 난 주말께 발표할 줄 알았다."

-박 전 대표의 공격에도 말을 아꼈는데.

"내가 이번 국면에서 조금이라도 맞대응한 게 있나. 전혀 없다. 아침마다 '어떤 공격이 와도 대응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자꾸 공격 받으면 대응하고 싶은 게 인간 아니냐. 그럴까 봐 아침마다 다짐했다."

그는 이날 충남 보령.논산.천안에서 세 번씩이나 당원 간담회를 하는 강행군을 했다. 중재안 발표 직후 그는 주변에 "실망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전 대표가 '고스톱 칠 때도 룰은 중간에 안 바꾼다'고 했는데.

"(박 전 대표가)고스톱 잘 치시나. 난 고스톱 못 쳐서 잘 모르겠다."

-박 전 대표 진영에선 (중재안에)부정적인 기류가 강하다.

"저쪽에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건 좀 거꾸로 된 것 아닌가."

그 말 속에는 자신의 입장이 그다지 반영되지 않았음에도 박 전 대표가 거부 의사를 비치는 데 대해 불쾌하다는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중재안 수용 의사를 굳힌 건 박 전 대표와 달리 경선 룰 조정작업을 당 지도부에 맡긴 만큼 이를 거부할 만한 명분이 약했기 때문인 듯하다. 경선 룰 고민을 털어버린 그는 10일 중앙선관위원회에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한나라당 당사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한다.

연기=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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