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보다 아름다운 '인간 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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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귀와 손. 연주자에게 특히 중요한 신체 부위다. 하지만 귀가 안 들리고 손이 안 움직인다고 최고의 연주자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청력을 상실한 타악기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와 오른손이 마비된 피아니스트 게리 그라프만을 보라. 인간의 의지는 음악 못지않게 아름답다고 이들은 웅변한다.

"높은 음은 얼굴, 낮은 음은 발로 진동 느껴"

"나의 가장 큰 인생 목표는 세상에 '듣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정확한 리듬 감각과 독창적 연주로 '최정상의 타악기 연주자'라는 평을 듣는 이블린 글레니(42)가 음악을 귀로만 들어온 청중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녀는 청신경이 손상돼 열두 살 때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오히려 더 샘솟았다.

영국 왕립음악원 시절, 그녀는 레슨 시간 동안 벽에 몸을 붙이고 서 있었다. 스승 론 포브스는 그녀의 등 뒤에서 팀파니를 연주했다. 팀파니 소리는 벽을 진동시켰고 글레니는 그 떨림을 피부로 받아들여 음의 높낮이를 구분했다. 그녀가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그녀는 "낮은 음은 다리와 발 부분으로, 높은 음은 얼굴부터 가슴으로 진동이 온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지금도 무대에 맨발로 선다. 진동을 느껴 연주하기 위해서다.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도 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대화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고 대화하며 전화 오는 소리도 못 듣는 상태다. 하지만 사람의 말은 못 들어도 공연장 음향 상태는 귀신같이 판단하는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베를린필 등 화려한 오케스트라와도 빈틈없이 호흡을 맞춰낸다.

글레니는 팀파니.드럼 등 정통 타악기는 물론, 새로운 타악기를 무대에 끌어올리기를 즐긴다. 한 무대에서 60여 개의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런 그녀에게 영감을 받아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곡이 100개가 넘는다. 글레니는 "청중이 그저 청각 장애인이 어떻게 연주할까에만 관심이 있다면 나는 실패한 것"이라고 했다. 첫 앨범으로 그래미상(1988년)을 수상한 사실은 그녀가 장애와 상관없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인정받는지 잘 보여준다.

1999년 내한해 인사동에서 한국 타악기에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던 글레니는 23일 오후 8시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연다. 스티브 라이히 등의 곡은 물론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직접 편곡한 작품도 연주한다.

"50대에 오른손 마비 … 왼손 피아니스트로 변신"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중 옥타브가 잇따라 나오는 부분은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더라구요. 결국 그 부분을 가장 잘 친다고 소문난 게리 그라프만에게 찾아가 따로 레슨받았어요. 손도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어찌나 완벽하게 치던지…."

피아니스트 이경숙(63)씨는 1970년대 최고로 칭송받았던 게리 그라프만(79)의 테크닉을 이렇게 회상한다.

하지만 그라프만의 아내 나오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79년 남편이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연습하는 걸 들었는데 모든 옥타브에 틀린 음이 들어있었다"고 밝혔다. 오른손에 이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넷째.새끼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부는 "3세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7세에 피아노로 첫 데뷔를 한 '천재'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일 년에 열 달 동안 연주 여행을 다닌 강행군 때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본인은 "67년 연주에서 오른손을 삐끗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만 밝혔다.

그라프만은 무리한 연습으로 오른손을 다친 작곡가 슈만의 사례까지 참조하며 의사.물리치료사를 찾아다녔다. 운지법도 바꿔봤지만 손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쳐야 하는 부분을 왼손으로 쳐봤다. 완벽한 음악이 나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보통 연주자에게는 왼손은 오른손보다 둔하고 약하지만 그라프만의 왼손은 강하게 단련됐다.

결국 그라프만은 연주 레퍼토리를 바꿔 '왼손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며 시련을 이겨냈다. 커티스 음악원장을 지냈고 출중한 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현대 작곡가들이 그에게 헌정한 왼손을 위한 작품만 7개다. 그는 지인들에게 "오른손을 다쳐 기하학.교육.미술 등 여러 분야로 눈을 돌릴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라프만은 18일 오후 7시30분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향과 협연무대를 연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손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라벨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한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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