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있어 웃지요 … 할머니 없이 못 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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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재희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친구다. 할머니는 "재희 없으면 웃을 일도 없다"며 "재희 덕에 이 정도라도 건강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재희는 "엄마·아빠랑 같이 살지 않지만 할머니가 있어서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사진=김상선 기자]

어버이날이다. 아이들은 카네이션 한 송이로 감사와 사랑을 아빠.엄마에게 전한다. 그러나 어버이날이 더 허전한 아이들이 있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할머니와 사는 조부모 가정이다. 엄마 대신 할머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재희를 찾았다.

1년 전 어버이날. 재희(10.가명)는 하루종일 엄마.아빠를 기다렸다. '어버이날 축하해요'라고 쓴 편지도 준비했다. 빨간 색종이로 카네이션도 접었다. 종이접기는 재희의 특기다. 그러나 엄마.아빠는 오지 않았다. 점심을 다 먹고 나서도, 해가 지고 깜깜해져도 오지 않았다. "편지하고 카네이션 다 찢었어요. 엄마.아빠가 있다는 얘기를 다시는 안 믿을 거예요." 열살 재희에게 어버이날은 상처로 남았다.

재희는 할머니(78)와 단둘이 20평이 채 안 되는 반지하 집에 산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때 빚을 지고 집을 나갔다. 드문드문 전화만 올 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이어 집을 나갔다. 재희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의 일이다. 할머니는 차마 재희에게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널 두고 나갔다고. 재희는 중국에 사는 고모를 엄마로 알고 지낸다.

조금씩 철이 들면서 재희는 할머니 말을 의심했다. "왜 아빠도 고씨인데, 엄마도 고씨야"라고 물을 때면 할머니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재희의 꿈은 화가다. 그러나 재희의 그림 속에 엄마.아빠는 없다. 할머니뿐이다. 지난해 미술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던 '강아지 가족'그림에도 강아지는 두 마리뿐이다. 어린이날이 지나고 친구들이 엄마.아빠랑 놀러갔다 온 얘기를 하면 재희는 속이 상한다.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걔들은 하니까… 짜증나요."

재희는 교회에 갈 때마다"우리 할머니 1만 살까지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저 하는 기도가 아니다. 재희에겐 절박한 기도다. "할머니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해요. 밥도 못하고, 알림장에 사인도 못 받고…." 재잘대던 재희가 갑자기 제 책상 앞으로 가 딴청이다. 감기도 안 걸렸는데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는 이런 재희 때문에 아파도 자리에 눕지 못한다. 4년 전 식도 수술을 받은 이후로 할머니는 죽만 먹고 지낸다. 요즘은 약한 중풍까지 와 더 걱정이다. 식탁에는 약봉지가 수북했다. 건강뿐 아니다. 교육비는 갈수록 느는데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 50여만원으론 턱도 없다. 기력이 달려 집안일도 벅차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우리 재희는 부잣집 딸 안 부럽다"고 한다. 따뜻한 이웃이 많아서다. 지금 사는 집은 대한주택공사에서 마련해 줬다. 한국복지재단에서, 교회에서, 이름 모를 후원자가 선물도 주고 나들이도 함께 간다.

무엇보다 씩씩하게 잘 자라주는 재희가 할머니에게 희망이자 용기가 된다. 재희는 손재주가 남다르다. 색종이만 있으면 케이크도 만들고, 꽃도 만들고, 집도 만든다. 재희는 올해 어버이날에는 할머니만을 위한 카네이션을 만들 참이다. 어버이날인 오늘, 재희 할머니 가슴에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빨간 종이 카네이션 한 송이가 활짝 필 것이다.

김영훈 기자

◆조부모 가정 후원=한국복지재단(www.kwf.or.kr) 1588-1940, 02-775-9121(내선 609)

◆후원 계좌=기업은행 035-043647-01-116(예금주 한국복지재단)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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