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득에 걸맞는 지혜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그는 고급와인을 주문하는 법을 잘 알고있다.
한은 시절 그는 「국제신사」로 통했고, 이후 신한은행장을 거쳐 현재의 부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직위에 맞는 집무실·승용차·오찬·만찬 등에 편안하고도 세련되게 어울리는 금융인으로 일해왔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일터인 은행을 떠나는 순간 그는 전혀 또 다른 은행원의 모습으로 변한다.
지하철 할인권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그는 서울시내의 지하철노선은 물론 웬만한 버스노선까지 훤히 꿰고있다.
일요일 나들이는 물론 온 가족이 움직이는 여름철휴가 때도 은행 일이 아닌 한 항상 차를 써본 적이 없는 그는 아직도 집에 자가용이 없는, 시쳇말로 「팔불출」의 한사람이며, 그래서 그를 비롯해 그의 가족들은 모두 「지하철 도사」들이다.
해외출장길에 가끔 부인을 위해 유명브랜드 옷가지를 사들고 오긴 하는데 거기엔 나름대로의 쇼핑비법이 있다.
마네킹 위에 오래 입혀져 전시되면서 때론 먼지도 앉고 손때도 탄 대신 정가가 없는 옷만을 골라 사는 방법이다. 따라서 그런 흥정은 그냥 점원과는 안되고 값을 매길 권한이 있는 매니저나 주인과 직접 흥정해야만 하는데 일단 흥정되기만 하면 영락없이 「반값이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한두 벌씩 마련한 외국 유명상표 옷가지가 제법 되지만, 그러나 지금도 그가 입을 만큼 입었던 티셔츠나 겨울내의 등은 빠짐없이 그의 부인이 「집안 옷」으로 또 다시 입을 만큼 입는 재활용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폐기되곤 한다. 가끔씩 『이건 너무 남자옷 같지 않느냐』며 부부끼리 쑥스러워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요즘은 남자옷, 여자옷 구별이 없어 참 좋다』는 것이 항상 도달하는 민주적·경제적 「합의」다. 한은 뉴욕사무소장 시절 그가 고안한 「투입 산출표」(Input-output table)는 지금도 그가 스스로 대견해하는 발명품 중 하나다.
원래 산업연관 분석을 위해 한은 조사부가 작성하는 것이 투입산출표인데 이 표를 응용, 퇴근 때 먼저 출출해진 사람이 「발동」을 걸어 한잔 사긴 사되 다음날 출근하면 각자의 「투입」(한잔 낸 비용)과 「산출」(더치페이로 분담할 비용)을 한 표에 모두 기입하고 월급날 정산토록 했던 것이 한은 뉴욕사무소의 투입산출표였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라는 경제의 제1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온 그에겐 지금도 구두에 징을 박아 신는다든가, 파출부를 부르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다 새삼스레 이야기할 것도 없는 「생활의 기본」이다. <김수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