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용광로' 달군 미국식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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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열린 제133회 켄터키 더비에 참가한 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첫째 코너를 질주하고 있다. [루이빌 로이터=뉴시스]


"달려라, 달려, 옳지. 이젠 돌아, 좀 더 빨리 돌라고."

5일 오후 6시(현지시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 15만6335명의 인파가 몰려든 경마장 '처칠 다운스'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3만 마리에 달하는 미 전역의 경주마 중 최상위 20마리만 출전하는 꿈의 레이스 켄터키 더비가 막 시작된 것이다. 호루라기와 함께 출발선을 떠난 지 2분2초. 7번 말 '스트리트 센스(Street Sense)'가 2.25마일(3.6㎞) 트랙을 완주하며 1등으로 골인하자 장내는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그 순간 경마장 한쪽에선 귀에 익은 이 지방의 전통민요 '올드 블랙 조'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그 여름날 검둥이 시절…."

5만 명을 수용하는 처칠 다운스 경마장은 수주 전에 표가 매진됐다. 암표 값은 5000달러까지 치솟았다. 이에 따라 당국은 경마장 외곽에 대형 화면을 갖춘 별도의 경기장을 마련했다. 여기선 40달러씩 내고 들어온 10만여 명이 한바탕 축제의 장을 펼쳤다. 이날 처칠 다운스에서는 2분여 만에 끝난 켄터키 더비 외에 오전 11시부터 11개 경마 대회가 벌어졌다.

미국 각지에 몰려든 경마 팬들은 카니발을 한껏 즐겼다. 웃통을 벗어 던지고 온몸에 진흙을 바른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건 말의 이름을 연호하며 뛰어다닌다. 가슴을 거의 드러낸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다 방송사 카메라를 보면 "와" 하며 달려가 포즈를 취한다. 24세 때인 1987년부터 2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켄터키 더비를 보러왔다는 교사 조 플렉(44)은 "이곳에 오면 살아있음을 느낀다. 미국만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축제"라고 말했다. 뉴저지주에서 왔다는 그는 "서부의 로스앤젤레스나 태평양의 하와이에서 온 사람도 있다. 미국 각지에서 온 15만 명이 살을 맞대고 환호성을 지르는 이곳이야말로 '인종 용광로(melting pot: 미국의 별칭)'"라고 예찬했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右)과 남편 필립공(左)이 처칠 다운스 경마장을 찾아 처음으로 켄터키 더비를 즐기고 있다. [루이빌 AFP=연합뉴스]

에이미 브리지스(27.여.부동산업)는 "경기도 경기지만 이 인파가 연출하는 축제 분위기를 즐기러 왔다"며 "미식축구.야구.농구 등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가 많지만 이렇게 경기장 바깥에서 수만 명이 얽혀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것은 켄터키 더비뿐"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신시내티에서 왔다는 60대 중반의 게일 엘리엇(여)은 "평생 여기 오는 꿈을 꿨는데 올 초 교사직을 은퇴하고서야 소원을 풀게 됐다"며 "마음껏 고함도 질러 보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춤도 추니 족히 10년은 젊어진 기분"이라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올해는 특히 귀한 손님이 왔다. 영국인들의 미국 정착 400주년을 기념해 미국을 방문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4층 발코니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본 것이다. 여왕은 처음으로 켄터키 더비를 관람했다. 우승마 스트리트 센스의 기수 켈빈 보렐은 "여왕이 보는 앞에서 우승한 건 나에게 모든 것이 이뤄졌음을 뜻한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올해 대회는 한국 경마 팬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모았다. 허영희 씨가 씨 암말로 쓰기 위해 2년 전 경매에서 6만 달러를 주고 산 '퍼스트 바이올린'의 2세인 '도미니칸'이 18번을 달고 출전했기 때문이다. 기대를 모았으나 도미니칸은 11위에 그쳤다.

레이스를 보기 위해 일부러 휴가를 내고 날아온 김국연(40) 한국마사회 과장은 "베팅에 몰두하는 한국과는 달리 이곳 관객들은 분위기를 더 즐기는 것 같다"며 "가족과 친구들이 승패에 관계없이 어울려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루이빌(켄터키주)=강찬호 특파원

◆ 켄터키 더비=벨몬트 대회, 프리크니스 대회와 함께 미국 3대 경마대회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우승 상금이 200만 달러에 달하며 우승마와 기수.마주는 세계적 스타덤에 오른다. 매년 5월 첫째 토요일에 열리는데 올해로 133주년을 맞았다. 가장 힘이 좋은 세 살짜리 경주마들만 출전할 수 있다. 켄터키주에서 경기가 열리는 것은 블루 그래스(칼슘이 많아 말 사료로 최적인 풀) 주산지로 미국에서 말이 가장 많이 사육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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