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년 헬싱키대회|최윤칠 군화밑창 신발로 마라톤4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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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의 올림픽출전 반세기를 되돌아보자면 마라톤의 최윤칠(64·현 진로 육상부 감독)씨처럼 아쉬움을 남기는 인물도 드물다.
우승을 눈앞에 두고 골인직전 전신경련으로 쓰러진 48년 런던올림픽이나 자신의 순위조차 모르고 막판스퍼트를 하지 않아 아깝게 4위로 골인한 52년 헬싱키올림픽 등 올림픽을 떠올리면 최씨는 항상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당시의 훈련방법·섭생·운동화상태·레이스운영 등 모든 것이 서투름의 연속이었기에 올림픽의 실패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마라톤에 대한 엄청난 국민적 열기와 세계수준의 기록 등을 감안할 때 최씨는 올림픽 마라톤이 인생에서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회고한다.
최씨는 런던올림픽에선 골인점인 메인 스타디움이 바라다 보이는 40㎞지점까지 1착으로 달려 한국의 최윤칠 선수가 1위로 골인한다는 장내 아나운스멘트까지 나왔으나 두 다리에 잇따라 쥐가 나는 바람에 기권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최씨는 이에 대해 당시의 훈련방법이 대단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때는 레이스중 물을 마시면 큰일나는 줄 알았어요. 요즘의 상식으론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그래서 35㎞만 지나면 탈수가 심해 헛것이 보일 정도였지요. 또 훈련방법도 평소엔 자기 취향대로 하다가 실전 1주일 전부터는 체력을 비축한다는 명목으로 하루30분씩 몸푸는 정도로 끝냈지요. 그러다 보니 대회에서는 대개 몸무게가 4∼5㎏씩 늘어 뚱보가 되곤 했지요. 지금이야 다 아는 상식이지만 대회 1주일 전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닙니까. 평소 65㎏씩 나가던 체중이 런던·헬싱키올림픽 때엔 70㎏씩 올라갔어요. 코치도 없던 시절이었고…. 그냥 웃어넘기기엔 쓰라린 구석이 많지요.』
최씨가 헬싱키올림픽에 나간 52년은 한국으로서는 1·4후퇴로 인해 부산에서 피난임시정부생활을 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당시엔 마라톤이 최고 인기스포츠였어요. 지금의 프로야구·축구·농구 등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더구나 36년 손기정 선배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쓴 이후 당시 올림픽 외에 국제대회로서는 유일하다 할 보스턴마라톤에선 47년 서윤복(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씨 우승, 50년 함기용(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겸 전무)·송길윤씨, 그리고 내가 1∼3위를 휩쓰는 등 세계최고를 뽐냈을 때였지요.』
그래서 영화관의 대한뉴스시간이면 수 년간 마라톤이 톱뉴스로 각광을 받았고 그 중에서 큰 키(1m73㎝)에 수려한 용모였던 최윤칠은 여학생 팬들의 구애공세에 즐거운 비명을 올리기도 했었다는 것.
『당시엔 꽤 유명했지요. 전란중이라 중학교 입시문제에 국방부장관이 누구냐(신성모)는 문제가 나왔는데 최윤칠이라는 답이 의외로 많이 나와 신문에 가십으로 크게 보도된 적이 있을 정도였다』고 최씨는 말한다.
하여간 51년10월 광주전국체전, 52년3월 대구 올림픽 마라톤선발전에서 두 차례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헬싱키올림픽 금메달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던 최윤칠은 「인간기관차」란 닉네임을 가진 체코 자토펙 출현으로 금메달에서 멀어진데 이어 복싱선수로 함께 갔던 동료 주상점이 도중에 응원을 나와 『천천히 가도 3등』이라고 해 느긋하게 골인하고 보니 4위였다는 것.
『힘은 그냥 남아있었는데 골인점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몰라 스퍼트도 못했지요. 운동장에 들어가니까 앞의 선수와 불과 1백m도 차이가 안 났으니까.』
최씨의 신발은 군화밑창을 오려붙여 만든 볼이 좁은 수제화로 골인하고 나니 양쪽 발가락 끝에서 가운데 팬 부분까지 껍질이다 벗겨져 걸을 수도 없더라는 것이다.
헬싱키올림픽에는 43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역도의 김성집씨가 런던대회에 이어 또다시 동메달을 땄고 복싱의 강준호씨를 포함, 동메달 2개의 전과를 올려 출전69개국 중 37위를 했다. <신동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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