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언론의 흥미위주 「한흑보도」/김정빈기자 LA지사(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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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4·29 LA흑인폭동이 발생한 뒤 LA타임스·USA투데이 등 미국의 유수 일간지들은 연일 한흑갈등 관계기사를 대서특필하고 있다.
4·29폭동의 본질적 문제인 흑백갈등에 대한 조명이나 분석·대안을 실은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갈등의 물줄기를 한흑차원으로 돌려놓고 있다.
한인식품상협 대표자와 흑인갱이 만난 사실을 LA타임스는 1면 머리기사로 컬러사진을 곁들여 대대적으로 보도했었다.
그 다음날에는 갱들을 상대로 한 흑인들의 협상이 과연 실효를 볼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시각을 담은 기사를 역시 1면 기사로 내보냈다.
USA투데이지도 마찬가지다.
물론 한인단체 관계자들이 흑인 갱들과 협상을 시도한 사실에 대해서는 한인사회 자체안에서도 비난여론이 일고 있는게 사실이다.
흑인사회를 대표할 수도 없고,신뢰할 수도 없는 흑인 갱들을 상대로 협상을 벌였다가 괜히 잘못될 경우 화만 자초하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인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미 언론들의 본질을 왜곡하는 보도자세다.
한흑문제를 어김없는 단골메뉴로 등장시키고 있는 미 언론들은 한흑갈등 특집방송을 다루고 흑인지역에서 고객들과 친절히 지내려고 노력하는 한인상인들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한인들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서도 흑인들의 「사과」 한마디 받아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있지만 폭동의 원인이 마치 한흑갈등에 있는양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미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해서는 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미 언론의 이러한 흥미위주식 한흑관계 보도로 인해 4·29폭동은 은연중에 한흑갈등이 원인이 된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도의 공정성을 자랑한다는 미국의 언론이 4·29폭동과 같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관해 진실을 외면한채 지엽적인 한흑관계만 들먹이고 있음은 참으로 가증스런 일이다.
4·29폭동이 흑인운전자 로드니 킹 구타 경관에 대한 무죄평결에서 촉발됐듯이 고질적인 흑백갈등이 근본원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마당에 미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태도에 한인들은 실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한인업주가 흑인강도의 총에 맞아 숨진 기사는 아예 보도도 하지않으면서 일개 흑인갱과 한 한인단체대표자의 만남을 호들갑스럽게 필요이상으로 크게 부각시키는 미 언론의 작태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을 절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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