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선과 페로돌풍/사업가는 대부분 독재형(해외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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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설득·타협의 민주정치선 성공 어려워/막연한 공약 제시… 9∼10월 인기 시들듯/슈레진저 뉴욕시립대 교수
사업가는 대부분 독재형이어서 민주국가의 정치가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미국의 보수적 정치분석가들의 시각이다. 미 뉴욕시립대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 교수도 이같은 관점에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일고있는 억만장자 로스 페로 후보의 돌풍이 9∼10월쯤 잠잠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다음은 월스트리트저널지에 기고한 그의 칼럼 요약이다.
사업과 정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질을 요구하는 별개의 영역이다. 우선 절차의 문제에 있어서 사업경영자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명령이 부하직원들에 의해 즉각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기대한다. 이유를 따지고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하급자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이같은 명령과 복종으로 정부를 끌어갈 수는 없다. 국회의원과 유권자들에게 정책 배경을 설명하고 설득·타협·동의를 구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사업가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드물고 대통령이 사업에 실패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역대 미국 대통령 40명중 사업가출신은 허버트 후버,지미 카터,조지 부시 등 세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업계에서는 주변인물에 불과,사업가 경력이 정치활동에 수업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나머지 대부분은 변호사,군장성출신으로 직업정치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사업가들의 단호하고 순발력 있는 추진력에 애정을 갖고있으며 이들이 관료주의의 비능률을 극복 사회기강 확립·낭비 및 부패척결·범죄일소 등도 사업처럼 해낼 것으로까지 기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페로후보는 단연 성공한 사업가인데다 연설회 등을 통해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하고 소박한 인상까지 심어놓아 순식간에 기성정치권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돌출이 본질적으로 현정부가 국내정치에 실패한데 따른 부산물이고 보면 인기가 얼마나 지속될지 의문이다.
일부에서는 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사업가들에게 정권마저 넘겨주게 되면 미국 정치의 근간인 견제와 균형이 깨질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루스벨트 전대통령은 『밑지고 장사해본 경험이 없는 사업가들이 정부를 주도하는 금권정치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전당포주인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미국 사업가들은 눈앞의 이익을 넘어선 보다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으며 페로후보도 이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로후보가 거친 정치판에 적응할 수 있을까. 사업가들은 개인적 습관,취미,인간관계 등을 침범받지 않았으나 정치판에는 사실상 불가침의 영역이 보장되지 않으며 시시콜콜한 과거까지 낱낱이 파헤쳐지고 만다. 또 사업할때는 외고집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국정을 운영하려면 법률가,로비이스트,선거운동가들을 통해 유권자를 설득하고 의원들과 타협해야 한다.
페로후보가 후보자들에게 곤란한 질문을 하는데 익숙한 기자들이 취조하듯 무례한 질문공세를 펴도 자신감과 부드러운 태도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는 순발력있는 언변으로 영도력·행동·개혁 등을 외치며 적자예산 탈피,세재개혁,교육여건 개선,마약퇴치 등을 공약했다. 그러나 부시,클린턴후보도 이같은 내용에 반대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문제는 「하여튼 좋은 일을 하겠다」는 식의 막연한 공약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국민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이며 법테두리안의 어떤 수단을 동원해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페로후보는 사업과 정치는 별개라는 말이 사실임을 입증할 위험에 직면하게 되며 그가 구체적 유권자들의 희망을 유지시키기가 어렵게 된다.
다만 그가 민주·공화당의 후보보다 월등한 자금력을 갖고 있어 중도포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유리한 입장이다. 그가 11월까지 버틴다면 텍사스,캘리포니아에서 승리해 대통령 선택권을 하원으로 넘길 가능성은 있다.
단언컨대 페로후보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후보들과 같은 입장에 놓여 피할수 없는 질문에 짓눌릴 것이며 현재 인플레이션된 그의 인기도 9∼10월쯤이면 디플레이션될 것이다. 그의 역할은 기껏해야 유권자들에게 정치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니라 국가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월스트리트저널=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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