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은 말리라고 했건만…/최종고(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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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구석을 보아도 순리와 화합보다 반목과 분쟁이 격심해지고 있다. 여야 모두 민생을 떠난 사색당파를 무색케하는 정치아닌 정쟁에로 몰고가는 것이 주범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원수가 도는 것이 정치라면 할말 없지만,이념과 윤리가 배제된 권력집착과 애증놀이는 정치적 무관심을 넘은 정치저주를 불러일으킨다.
○늘어만 가는 분쟁·반목
원시적 감정이 출렁이는 이 사회에 원한과 복수,폭력과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도 전쟁이고,6·25피난길보다 더한 서울의 일상교통도 전쟁상태다. 이런 비정상 질서 속에서 억울함이 많을수록 한풀이도 많다. 숨막히고 암담할수록 민심은 찢기고 정신건강은 해쳐진다. 어디서 희망을 찾을지 구호는 많아도 진정한 권위와 위안은 없다. 사건에 사건,우리는 모두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분쟁사건들이 많을수록 결국 법률문제로 되고,법률가들은 건수를 챙겨 서초동의 「법조타운」은 번창하고 있다. 그러나 법률가가 분쟁을 파먹는 기생충이 아니고 진정한 정의의 선도자가 되려면 이 사회의 문제상황에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법마저 병든 사회는 어디서 구제받을 수 있겠는가.
수년전부터 대법원에 사법제도개선심의위원회가 작동중인데 이렇다할 결론을 제시,실천하지 못하는 것 같고,오히려 사법부의 비리가 국민적 심판대에 올라서게 되었다. 요즘 민사재판제도의 개선책을 논의하고 있는데,대법원의 업무과중으로 상고허가제,하급심의 증대,사법보좌관제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근원적으로 우리사회에 분쟁해결에 관한 제도와 현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분쟁해결을 위해 소송외에도 화해·조정·중재 등의 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민사조정법이 시행된지 2년이 되었지만 홍보부족과 국민의 선입견때문에 소송외 분쟁해결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심판대 선 사법부비리
일본이 민사사건의 20∼30%를 주정으로 처리하는데 우리는 2%도 못하는 실정이다. 이처럼 한국인은 일본인에 비해 조정(타협)보다 소송(승부)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한솥밥 먹고 송사한다」「소송 3년에 기둥뿌리 뺀다」「송사는 패가망신」이라는 전통관념에 비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산이 깨지냐,평택이 깨지냐」고 「끝장내자」는 오기와 불신,무절제는 인간관계의 파탄을 전제로 한 소송관일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고 우울하게 한다.
여기에는 분명 제도의 문제와 의식의 문제가 함께 있다. 제도적으로는 법원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조정의 활성화를 주도해야 하고,변호사들도 수임료와 「성공사례금」을 노려 소송으로 몰고가지 말고 지혜로운 분쟁해결의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법학교육,특히 사법연수원의 교육도 예비 판·검사를 위한 판결문 작성같은 것만 강조하지 말고 「분쟁해결론」 내지 「분쟁예방론」 같은 과목도 가르쳐야할 것이다.
예부터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것이 어른스런 모습인데,법률가가 싸움을 붙이고 돈만 버는 졸부가 되어서야 국민의 질책을 면치못하는 것이다. 국민들도 악에 받쳐 소송을 복수극같이 생각해 온갖 끈과 부탁을 동원해 법정에서도 거짓말을 밥먹듯,폭력을 과시해서라도 이기고 말겠다는 원시적 감정을 정화시켜야 한다. 근자에 우리 재판제도와 국민적 정당성을 의심하면서 국민참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법피해자 대책위원회인가 하는 이름도 들린다. LA사태로 사법의 부정의가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목격하기도 했다.
우리 법치주의의 외관을 벗기고 내면을 들여다 보면 많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정치가 소란스럽다보니 법문제는 항상 관심의 뒷전으로 밀린다. 국회의원의 법제정자로서의 면모는 사라진지 오래다.
우리의 현실은 범죄를 부추기는 사회문화를 만들어 놓고 법망에 걸려들면 처벌만 능사처럼 되어 있다. 왜 우리는 선진국처럼 법을 잘 만들고,잘 알리고,잘 집행해 소송으로 폭주하지 않고 지혜로운 분쟁해결을 가꾸어가지 못하는가. 물론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나라 어디에 이것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운동의 구심체가 있는가. 매년 「법의 날」을 맞을 때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법의 날」 부끄럽기만
다시 이기적인 법률가군상에게 화살이 돌아가지만,어쨌든 우리사회도 조금씩 합리적으로,평화적으로,분쟁예방적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되어야할 것이다.
서양에서는 「신에 평화」운동을 교회가 주도해 원한과 복수를 제한해온 역사가 있는데 우리의 원시적 복수감정을 승화시킬 구심체는 종교일까,교육일까,법만으로 가능할까. 고려시대에는 산사에서 내려준 떡을 먹고 원수와 화해하는 벌이 있었다는데 1년에 하루를 「해원의 날」로 제정하는건 어떨지. 아무튼 분쟁해결의 합리적 방법은 국민적 지혜를 모아갈 중요과제라 생각한다.<서울대교수·법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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