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의 화가’ 류전샤의 슬픈 가족史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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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26면

20여 년 전 쑤저우 공업미술대학교 교장 시절의 류전샤. 김명호 제공 

류전샤(劉振夏ㆍ66)는 일반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중화권 예술계에선 큰 영향력을 가진 화가다. 1980년대 ‘위포(漁婆)’라는 수묵인물화가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 주인공이 류전샤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④ ‘은둔의 화가’ 류전샤의 슬픈 가족史

그는 명예와 이익은 뒷전으로 했다. 쑤저우(蘇州) 한구석에 은거해 작품에만 몰두했다. 4개의 원칙을 고수하며 이를 어긴 적이 없다. ‘내보이지 않고(不發表), 전시회를 열지 않고(不展出), 팔지 않고(不 ), 주지 않는다(不送)’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림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화폭은 하나의 여행지다. 여행을 하면 많은 사람을 만난다.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그들을 사랑했다. 화폭에는 그들과 나눈 많은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쯤 되면 그의 사불(四不)이 이해가 간다.

고희(古稀)가 다 돼 책을 한 권 냈는데 중화권 예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모이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된 것이다. 대만에서 그에 관한 기록물을 만든 적이 있다. 말미에 그를 일컬어 “회화의 대사(大師), 문자의 대사”라고 했지만 그 자신은 한사코 “나는 대사가 아니다”고 부인했다.

류전샤는 어렸을 때 부친이 실종됐고, 이어 모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조부에겐 늘 반혁명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바다 건너에서 온 편지 한 통으로 의문이 풀렸다. 아버지는 국민당 고급 장교였고, 큰아버지는 대만 국방부장을 지낸 구주퉁(顧祝同)이었다. 성이 류(劉)인 것은 외가 성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수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서 분출되는 쾌락이다. 그림이 완성됐을 때 쾌락을 느낀다. 그러나 그 또한 순간일 뿐 곧 사라져버린다. 남는 것이라곤 끝없는 불만족과 함께 오는 번뇌일 뿐이다.”

쑤저우는 인구가 1200만 명에 이르는 대도시다. 역사적으로 많은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배출했다. 쑤저우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모른다면 쑤저우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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