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유혹하는 ‘번트의 함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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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6면

야구에서 번트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투수를 향해 모로 서서, 다리를 땅에 굳게 붙이고, 홈플레이트 앞에서 공을 살짝 맞히기만 하면 되니까 그것처럼 쉬워 보이는 게 없다. 과거의 야구전문가들은 번트 실패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조소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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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실제로는 번트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투수는 투수대로 번트를 정확히 대지 못하도록 최대한 방해하는 상황에서 번트는 쉬운 게 아니다. 더구나 요즘은 많은 구장이 인조잔디여서 타구가 빠르게 멀리 굴러가므로 번트타구 속도를 충분히 죽이기가 어렵게 됐다.-

야구 칼럼니스트 레너드 코페트의 책 ‘야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번트에 대한 부분이다. 코페트의 지적처럼 번트는 가볍고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타격 기술이다.

그 ‘번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김재박 LG 감독이다. 그는 현역시절 역대 최고의 번트-이렇게 불러도 무방하리라고 본다-를 댔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일본전에서 그가 성공시킨 ‘개구리번트’는 영원한 명품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투수가 의도적으로 바깥쪽으로 뺀 공을 ‘펄쩍’ 뛰어올라 3루쪽 파울라인 안쪽을 절묘하게 타고 흐르는 타구를 만들어 낸 그에게는, ‘번트의 달인’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하다.

김 감독과 번트의 인연은 그가 지도자가 된 뒤에도 계속됐다. 김 감독은 지난 시즌 153개의 희생번트로 역대 최다기록을 세우는 등 번트 애호가로 불린다. 그래서 ‘번트야구’라는 이름도 붙었다. “번트는 가장 안정적으로 주자를 진루시킬 수 있는 수단이며 주자를 스코링포지션으로 보내놓고 공격을 진행했을 때 가장 득점확률이 높다”는 게 그가 신봉하는 ‘야구의 정석’이다.

번트는 현역 시절 그를 스타로 만들었고, 지도자로서도 세 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한몫을 했지만 그를 패장의 나락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지난 해 도하아시안게임.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불렸던 11월 30일 대만전에서, 김재박감독의 한국대표팀은 2회부터 8회까지 매 이닝 선두타자가 진루했지만 찬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날 대표팀의 발목을 잡은 공격루트는 바로 세 번이나 실패했던 ‘번트’였다. 대만에 2-4로 진 대표팀은 일본에도 졌고, 역대 최악의 망신을 당했다.

그래도 번트에 대한 김 감독의 신념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여전해 보인다. 지난달 23일 SK와의 시범경기. 1-2로 뒤진 9회 무사 1,2루에서 김 감독은 이대형에게 번트를 지시했고, 불행히 그 작전은 실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김 감독은 “타자의 잘못이다. 작전이 걸리면 스트라이크 비슷한 공은 번트를 대줘야 한다” 고 이대형을 나무랐다.
이 대목에서 코페트가 지적한 ‘번트의 함정’을 되새기게 된다. 번트를 가볍고 당연한 기술로 여겨 모든 타자에게 적용시키기 쉽지만, 그 번트는 결과에 따라 약이 되거나 독이 되어 팀과 감독을 함정에 빠뜨리고 만다는. 그리고 그 번트를 실패했을 때 책임은 선수에게도 있지만 번트에 능하지 못한 타자, 성공확률이 낮은 상황에서 번트를 요구한 감독에게도 있다는 것을. 세상에는 번트처럼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똑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으며 우리는 늘 그걸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네이버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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