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6)제88화 형장의 빛(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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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대문 구치소 동네>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내가 잊을 수 없고 남기고 싶은 일들을 회고하자니 참으로 많은 일들과 사람들이 생각난다. 귀한 지면을 빌려 내가 하는 얘기들이 실로 많은 사람들과 아름다운 감동을 함께 나누는데 기여했으면 좋겠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101서대문구치소(현재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으로 옮겨갔다)의 담을 끼고 있는 언덕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매일같이 교도소 담을 끼고 앉아 붉은 담벽에 공을 튀기거나 구슬치기를 하면서 놀았다.
재소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다니는 내가 서대문구치소 담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내 어머니는 부장 교도관을 지냈다. 또 내 여동생은 서울구치소 교도관을 지냈고 남동생은 검찰 공무원으로 있다. 그리고 나는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으로 있으니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은 잡아넣고 한 사람은 지키고 또 한 사람은 교화활동을 해온 셈이다.
이것도 운명일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불가에 귀의하라는 팔자였는지 모른다.
나와 아버지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내가 첫 돌이 지날 무렵 아버지는 미륵부처가 있는 절 마당에서 개를 잡아먹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지스님이 『부처님 도량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냐』고 꾸짖었더니 아버지는 『저 돌부처가 무슨 영험이 있느냐. 만약 영험이 있다면 나에게 벌을 내려보아라』하고 고함치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몸에 불이 붙었다고 이리저리 뒹굴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때에 나도 똑같이 고통스럽게 울기 시작했다는데 나는 곧바로 머리로 열이 터져 나와 간신히 생명을 건졌다.
내 머리에 그 상처는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결국 내 생명과 아버지의 생명을 바꾼 셈이었다.
전문학교를 나와 승마까지 할 정도로 개화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부처님이 살아 계신 분임을 알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내 고향의 기억은 6·25때로 거슬러간다.
당시 나는 여덟살이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바로 우리집 뒷산에 진지를 구축했고 우리집을 사이에 두고 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지붕 위로 포탄이 비오듯했다. 인민군은 양식을 비축해두기 위해 서대문구치소를 이용했다.
국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점령한 곳은 서대문구치소였다.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국군은 옥문마다 가득 쌓인 양식을 시민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구름같이 몰려들어 마구 쌀과 귀중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질서와 혼란의 도가니였다.
보다못한 유엔군 법사 몇몇이 위협사격을 가하며 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에 나섰다.
때마침 쌀자루를 들고 나오던 한 여인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임신한 여인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여인 옆으로 하얀 쌀이 무수히 흩어져있었다. 나는 교도소 담벽에 붙어 서서 이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린 나에게 이 여인의 불행한 죽음은 큰 충격을 던져 준 것 같다.이 가련한 여인을 보고 어릴 때부터 나는 커서 좀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호할 수 있는 변호사를 내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성장했으나 변호사는 되지 못했다.만약 변호사가 되었다면 지금의 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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