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올림픽 경기가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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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 03면

일러스트 이강훈

가끔씩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한 한류(韓流) 관련 행사가 야단스럽게 신문을 장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어마어마한 문화적 파급 효과라도 있는 양 포장되어 현지 시민들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처럼 소개되는 것을 보면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해당 연예인에게 나쁠 것 없고, 읽는 독자도 흐뭇하고, 정작 한류의 당사자는 익명의 다수이니 내가 언제 열광했느냐고 문제 제기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한류 자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해 몇몇 국가에서 나타났던 ‘실체적’ 한류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무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류의 스밈과 번짐

문제는 사람들이 즐기고 누리는 문화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트렌디한 현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고 있는 아시아의 몇몇 국가를 제외한다면, 이미 안정된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 보통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아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사회문화적 시스템이 공고하게 굳어져 있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한류적 현상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사실 언감생심이다. 설사 한두 개의 작품이 일시적 붐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정말 넓은 저변에서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기를 기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온갖 세계 문화가 각축을 벌이고 있는 뉴욕 사회에서 한류의 실체를 한번 살펴보자. 대표적인 공연장 링컨센터에서 나온 안내자료를 보면 프로그래밍 부서의 열한 명 중 일본계는 음악 부문 책임자를 비롯해 네 명이나 된다. 하지만 한국계는 아직 한 명도 없다. 홍혜경이나 장영주 등 몇몇 아티스트가 활약하고는 있지만 오자와 세이지처럼 미국의 대표급 교향악단에 자리 잡은 지휘자도 아직은 없다. 언어에 따른 문화적 할인율이 없는 무용 분야에서 일본의 작품은 무용전문 공연장으로 명성이 높은 조이스극장의 무대에 오르며 뉴욕 타임스와 빌리지 보이스 등 주요 매체를 연일 장식한 데 비해, 우리 무용은 상대적으로 마이너급 공연장 무대에 오르면서 객석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아직은 이쪽의 주류 트렌드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대중적인 쪽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난타’가 잠시 무대에 오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스톰프’나 ‘블루맨그룹’ 혹은 ‘마유마나의 비(BE)’와 같은 넌버벌 퍼포먼스가 아직도 건재하여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롱런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시각예술 쪽은 또 어떠한가.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 잡은 바리오박물관(El Museo del Barrio)이나 중국 문화를 활발히 전파하는 중국박물관(The Museum of Chinese in the Americas) 등의 모습과 달리 한국 문화는 큰 박물관의 동양관 모퉁이에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백남준 정도를 제외하면 경매시장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아티스트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게 바로 온갖 나라의 문화가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는 뉴욕의 한구석에 이름도 없이 숨어 있는 우리 문화의 현실이다.

희망의 한류, 한국 요리

오히려 희망적인 한류는 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국 요리다. 음식과 여가문화에 대한 대표적 사이트 중 하나인 ‘시티서치(citysearch.com)’에서는 각 음식점에 대해 이용자들이 평점을 매기도록 하고 있다. 10점 만점에 보통 9점이 넘으면 꽤 평가가 좋은 음식점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기서 최고 평점인 9.9를 받은 음식점은 다름 아닌 ‘수라’라는 한국음식점이다. 많은 한국음식점에서 한국계보다 현지 손님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스시보다 김밥이 더 빨리 매진되는 카페테리아도 많아지고 있다.

음식문화 쪽의 현상에 비추어볼 때 한국 문화가 일시적 흥밋거리를 넘어 일본이나 중국 문화와 차별성을 가지며 저변에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보다 천천히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게 접근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얼마 전 하버드 대학의 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처럼 문화가 ‘생명이 있는 오가닉 파워(organic power)’로서 자생적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아울러 한국적이되 민족주의적 색채가 묻어나지 않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문화라는 게 그렇게 인위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여태까지 명멸해간 그 많은 역사적 강자들이 왜 문화적인 면에서는 별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그렇게 사라져 갔겠는가.

정말로 한국 문화가 서구 문화의 저변에 번지게 하려면 이제 이벤트나 일시적 현상에 스스로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가능성을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하고 현지의 수용자들이 이를 주체적 입장에서 선택해 그들의 문화와 결합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물론 생색도 나지 않고,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그게 좀 더 깊이 스며드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한류라는 게 혹은 문화라는 게 태극마크 달고 하는 국제경기처럼 명확한 승부를 가릴 수 있는 분야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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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성씨는 문화관광부 문화예술교육과장으로 일하다 현재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교 예술교육연구센터 초빙연구원으로 연수 중입니다. 월간 ‘객석’ 음악평론 당선, 이화여대 겸임교수, 아마추어 재즈밴드 ‘프리톤’의 드러머 등 다재다능한 문화형 인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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