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여인, 마리안의 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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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25면

마리안 스톨(Marianue Stoll), 올해 쉰한 살이 된 그녀는 취리히에서 기차로 30분쯤 떨어진 뮈흘렌(Munchwilen)이라는 작은 전원도시에서 살고 있다.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취미는 뜨개질과 모빌 만들기. 우리는 몰타의 한 영어학교에서 만났고 보덴 호수와 헤르만 헤세에 대해 얘기하다 친구가 되었다.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관대한 이 넉넉한 여인은 나로 하여금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아직 살아 있다면 아마 저렇게 발랄하게 늙어가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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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리안을 취리히 공항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왠지 그녀를 끌어안고 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그건 그녀의 남편인 마커스의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혈액암 환자를 남편으로 둔 중년 여인의 절망감을 무엇으로 위로해야만 할지 아주 막막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처음엔 조금 이상했다. 나는 마리안이 가족에게 헌신하는 천사처럼 착한 여자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런 여자가 병원에 남편을 혼자 남겨두고 친구라지만 가족에 비하면 낯선 이방인에 불과한 나와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며 웃으며 와인 잔을 기울일 수 있다니 한국의 현모양처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마리안은 말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 때문에 자주 슬퍼지지만 밤이나 낮이나 병원에서 함께 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대신 집에서 그를 위해 밤이면 촛불을 켜고 기도를 하지. 양말 같은 걸 뜨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마리안의 현실감각을 존중한다. 대부분의 스위스 사람이 그렇다. 이웃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공들여 현관 입구와 정원을 가꿀 만큼 타인을 대단히 배려하는 그들이지만 어떤 순간에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다. 내가 그 유명한 영국식 정원보다 키 작은 꽃들을 푸른 잔디 위에 흩뿌려 놓은 듯 두서없이 드문드문 심어놓은 스위스식 정원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마리안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직업학교를 거쳐 지금은 자동차를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기술자로 일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들이 대학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스위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 중 오직 18%만이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데 스위스 부모들은 그 18%의 선택이 다른 82%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요즘 한국의 어떤 부모들은 학습력을 높이기 위해 아이들을 클리닉에 보내고 심지어 그 성분이 의심스러운 이상한 알약을 먹인다는 얘기는 결코 하지 못했다.

봄을 맞은 마리안은 요즘 꽃 파는 처녀처럼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오늘 아침엔 겨우내 현관 앞을 지키던 산타클로스 인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두 마리 닭 인형과 봄꽃들에게 그 영광스러운 문지기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내게 엔젤을 좋아하냐고 묻더니(그러고 보니 난생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엔젤이라고? 우리가 천사라고 알고 있는, 하늘에 산다는 그 미확인비행물체 말이니?) 엔젤 모양의 모빌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햇빛 쏟아지는 테라스에 나란히 누워 왜 저 언덕 위의 나무는 자기 혼자 서 있는지, 왜 혼자 서 있는 나무가 다른 무엇보다 숭고해 보이는지 얘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비행기가 지나간 하늘의 길들이 파랗게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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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허니’ 김경씨는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인터뷰어로 개성 넘치는 책 『뷰티풀 몬스터』『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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