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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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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목이 뻣뻣해졌다. 하마터면 목 디스크에 걸릴 뻔했다. 나에게 하는 인사 각도가 90도다. 책상 보고 머리를 숙이는데, 나한테 굽실거리는 줄 알았다. "그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느덧 나는 책상과 한 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목이 굳고, 책상과 한 몸이 된다고?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벌레가 되어 있었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류 소설이 아니다. 통계청장을 지낸 오종남씨가 지난달 들려준 청와대 비서관 시절의 회고다. 오씨는 출세한 관료 출신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17회로 공직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다. 경제기획원에서 주요 과장을 거치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정책.건설교통.산업정보통신과학.재정경제 비서관을 지내며 기업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비록 정무직인 장관은 못 해 봤지만 공무원 최고직인 차관급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만하면 출세한 셈이다.

그랬던 그가 요즘 '행복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모든 공직에서 떠나 일본 와세다대 경제학과 교수, 컨설팅 대표로 있으면서 '행복'을 주제로 한 강연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비서관 시절 목에 잔뜩 주었던 힘을 완전히 뺀 채. 오씨는 행복에 대해 얘기하면서 초등학교 시절 배우는 국어와 산수를 예로 들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국어에서는 주로 뭘 배우나요? 문단의 주제를 파악하는 거죠. 산수는? 분수를 중요시하지 않나요?"

느닷없는 소리에 처음엔 알쏭달쏭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배꼽을 잡을 일이다. "오호~, 자신의 주제 파악 잘하고, 분수를 알라. 그게 행복이다. 그런 소리군." 오씨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은 간단한 공식으로 표현된다. '행복지수=이룸/바람'이다. 여기서 분모인 '바람'을 줄이면 지수가 올라간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혹자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다. 자기는 출세할 만큼 다 해놓고 남보고 바람을 줄이라니…. 그래야 행복해진다니….

사람마다 행복의 조건은 다르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해야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삶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대권을 잡기 위해, 최고경영자(CEO)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행복으로 즐기는 부류도 있겠다. 오죽하면'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경쟁을 잠시 접는 것도 행복일 수 있겠다. 우리들은 행복을 쫓다가 너무 지친 것은 아닌지. 행복은 바로 곁에 있는데 멀리서 찾으려는 것은 아닌지.

내일은 5월 '가정의 달'이 시작되는 첫날이다.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기다리고 있다. 매년 셋째 월요일인 성년의 날(올해는 21일)도 있다. 적어도 5월 한 달만큼은 행복을 가정에서 찾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 아무리 회사 일에 치이고, 나랏일에 바빠도 아내나 남편에게 "당신은 나의 행복"이라고 한마디 건넬 만한 5월이다. 저능아 아들의 초등학교 무사 졸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가족영화 '날아라 허동구'를 자녀와 함께 보러 가는 것도 괜찮겠다.

5월의 행복은 아내의 젖은 손 안에 있다. 가족 먹여살리느라 빠져 버린 남편의 머리카락 속에 있다. 아내의 손바닥을 비벼 주며 행복을 캐자. 내가 파악하고 싶은 주제는 가족에 있으며 내가 지켜야 할 분수는 가정에 있다. 그러면 비서관 시절의 오종남씨처럼 목 디스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책상과 한 몸이 될 우려도 전혀 없다. 가정의 달 5월엔.

정선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