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위기상황의 진단과 처방|불신 부르는 "속빈 시나리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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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시나리오는 건축에 있어서의 설계도나 좋은 요리 재료에 곧잘 비유된다.
뛰어난 장인일지라도 설계도가 허술하면 좋은 집을 지을 수 없고 상한 재료를 보고 음식을 만들려는 요리사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 영화진흥공사가 실시한 영화여론조사에서 관객들 대부분이「우리영화가 외화에 비해 재미없는 이유」로 ▲소재의 빈곤 ▲제작비의 빈곤 ▲내용이 유치해서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중「제작비 빈곤」을 빼고는 모두 한국영화의 시나리오 빈곤을 반영하는 것으로 좋은 시나리오 작가와 소재발굴이 영화 회생력의 선결 과제임을 나타내고있다.
이 조사에서는 또 관객들 중 대다수가 영화관람 선택기준으로「영화의 내용」을 꼽았고 출연 배우·감독·제작자는 관객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한국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안 보는 이유는 영화의 내용이 보잘것없기 때문이란 사실이 확인되며 이는 영화의 소재·구성, 곧 시나리오가 허술한 것이 불신의 1차 요인임을 알려준다. 물론 시나리오는「설계도」이기 때문에 이를 영상으로 표현해「상품」으로 완성시키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감독의 역량에 달려있고 따라서 관객의 불신을 해소시킬 책임도 감독에게 있다.
외국의 이름난 감독들은 대개 시나리오를 직접 쓴다. 우디 앨런·프랜시스 코폴라·올리버 스톤·프랑수아 트뤼포 등이 좋은 예다. 시나리오와 연출은 마치 내외간과 같아 어느 한쪽이 부실하면 완성도에 치명상을 입을 염려가 있어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정지영·장선자·장길수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직접쓰는 고무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는 왜 허술한가. 시나리오는 크게 보아 소재와 그 소재를 비벼 넣는 틀, 그리고 등장인물로 구성되며 그것들이 모여 한 영화가 갖는 지향성, 곧 주제를 나타내준다.
소재문제는 작가의 문제의식 부족이나 심의(검열)등의 이유로 따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나 어떤 소재이든 그것을 요리해내는 구성이 엉성하면 영화 전체가 헐렁해질 수밖에 없다.
복선과 반전의 재미, 이완·강약의 리듬, 이야기를 끝까지 밀도 있게 이끌어 가는 통일감등이 부족하면 2시간 가까이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오랫동안 영화기획에 종사한 김갑의씨는 한국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설정 미숙과 직업표현의 미숙을 들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각자 자란 과정과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르게 상황에 반응하게 마련이고 구사하는 대사도 전차 만별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치밀한 인물설정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작가 송길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1급 작가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공들여 쓴『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명자가 도일하는 이유가 만일 정신대 징발이었더라면 이 영화는명자로 상징되는 한국 여인의 역사적 비극을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했을 것이다.
『명자…』와 비교하기엔 민망스러울 정도의 가령 김성종 원작의 추리물『제5의 사나이』를 보면 국제범죄조직·전문킬러·한국 수사기관간의 치열한(?)사투가 소꿉장난 수준에서 맴돌고 있다. 한국 영화에서는 아직도 상처입은 여자는 괴로워서 아무데나 몸을 굴리고 괴로운 사람은 술만 마셔대며 기자와 형사는 바바리 코트를 걸친 상투적 표현을 못 벗어나고 있다.
전문 시나리오 교육기관의 설립과 할리우드처럼 시나리오 작가에게 주연배우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줘야 영화진흥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란게 영화계 안팎의 지적이다. <이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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