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생일 맞아 노익장 과시|6·25 참전 전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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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부터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한국전에 참전했으며 한국전에서 외아들을 잃은 제임스 올워드 밴플리트 장군이 지난달 1백세 생일을 맞았다.
밴플리트 장군은 1915년 미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제2차 대전 중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가해 용명을 날렸다.
53년 한국 전쟁 중 미 제8군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특히 한국 육군사관학교 재건에 큰공을 세웠다.
53년 대장으로 퇴역 후 미국 대통령 특사로 극동 지역을 방문하고, 그후 한미 재단 총재로 제주도 목장 건설 등 한국 재건과 문화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밴플리트 장군이 살고있는 플로리다주 포크시티는 우리에게는 디즈니월드로 잘 알려진 올란도 시에서 자동차로 40여분 떨어진 한적한 농촌 도시였다. 비록 지방의 소로이기는 하나 포크시티는 그의 집이 있는 길 이름을 밴플리트라고 불일 정도로 그에 대한 긍지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번 생일 행사도 이 시가 주관해 그의 모교인 미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은 물론 전국에서 축하객이 모였는데 그의 집안에는 지난번 생일 때 이곳 국민학생들이 그린 축하 그림, 시민들이 만들어놓은 꽃 장식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
걸음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는 그는 거실의 책상 앞에서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장군이 1백회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한국 사람들이 반가워했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일과는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걷기에 약간 불편한 것 외에는 건강한 편입니다. 보통 아침 식사와 함께 TV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전에는 주로 편지를 보거나 쓰는 것으로 보내지요.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매일 시간을 맞춰 생활합니다. 군에 있을 때의 규칙적인 생활 습관 때문인가 합니다. 오후에는 정원에 나가 나무들도 돌아보고 새들에게 먹이도 주곤 합니다.』
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점심 접시를 모두 비우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아이스크림도 모두 비울 정도였다.
-한국전 당시 미군 사령관으로서 함께 참전한 외아들 (제임스 올워드 밴 플리트 2세 당시 공군 조종사) 을 잃은 것을 한국 국민들은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자손은 몇이나 두었습니까.
『두 딸과 8명의 손자, 그리고 12명의 증손자가 있지요.』
-당시 만주 폭격·핵폭탄 사용을 주장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 사령관과 전쟁을 빨리 마무리지으려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간의 불화는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확 전을 주장했던 맥아더 원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당시 만주에 전술 핵무기를 사용하자던 맥아더의 계획에 나는 찬성했습니다. 당시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핵폭탄을 투여해 전정을 조기에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 수천명의 인명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만일 적이 같은 입장이었다면 그들은 핵무기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핵무기 사용에 찬성했지만 오늘날은 달라졌습니다. 핵무기 사용은 금지돼야 합니다. 따라서 그때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당시 휴전을 구상하고 있던 워싱턴 정부는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억제해 일선 사령관으로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38선 이북으로 진격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확신이 있었다면 워싱턴 정부에 진격을 건의한 적은 있습니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당선 직후인 52년12월 당선자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많은 각료를 포함, 군부 지도자들이 수행했는데 나는 미군의 더 이상 투입 없이 한국군을 증강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세부 계획을 보고했지요. 당시 나의 건의를 받아줄듯이 보였습니다. 나는 승리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기 앞서 나의 건의에 결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애석하게도 이것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반대해 미국 정부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당시 이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는 많은 지혜와 경험을 가진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나는 그를 존경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나의 훌륭한 친구였습니다. 한국 전선에 도착하는 미군을 맞으러 나는 그와 종종 나갔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며 한국군의 증강을 호소했습니다.』
-당신은 한국군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군인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군인 교육의 목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의지를 갖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군 지도자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군인은 헌법을 수호하고 선출된 민간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쳐야 합니다.』
그는 한국전을 끝으로 53년 은퇴한 후 이곳 플로리다에서 40여년을 살고 있다. 그는 이곳의 주변 2천 에이커를 사들여 농장도 경영했고 부동산 회사도 운영했다. 지금도 그의 집은 수백 에이커의 농장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집은 검소한 단층집으로 농장 일을 돕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 그의 집에는 한국 방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이 방에는 이승만 박사를 위시해 박정희 대통령 등 한국 지도자들이 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 및 각종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6·25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아직도 분단 상태에 있습니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나는 한국은 반드시 통일되어야 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견해에 동의해 왔습니다. 그같은 일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연합국들의 지원이 필요했었는데 불행히 그것이 뒷받침되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북한을 먼저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만큼 그가 연합국의 정책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이 이뤄낸 오늘날과 같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성취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자유를 위해, 또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국민이 어떻게 되는가를 세계에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한국 국민을 존경합니다. 한국이 축복 받기를 바랍니다.』
노 장군은 기자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포크시티=문창극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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