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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고문 피해자의 복수 극을 묘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창작극 공연만을 고집해온 극단「미추」가 처음으로 선보인 번역극『죽음과 소녀』가 뛰어난 극적 구성, 충실한 연기로 주목받고 있다. 5일 본 공연에 앞서 열린 프리뷰 공연부터 많은 관객이 몰려든『죽음과 소녀』는 번역극이면서도 우리 얘기인 듯 피부에 와 닿는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남미출신 작가인 아리엘 도르프만 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비슷한 정치적 경험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군사독재하에서 성 고문당한 여성이 민주화이후 겪게 되는 일상의 고통과 복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었던 젊은 여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눈을 가리운 채 비인간적인 성 고문을 당한다.
동료였던 변호사와 결혼, 이제 민주화된 조국의 상류계층으로 외견상 행복해 보이지만 여주인공은 지난날의 고통에 시달린다. 젊은 날의 고통, 눈이 가려져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파괴한 고문담당 의사의 목소리와 체취, 그리고 고문 때마다 틀어놓았던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죽음과 소녀』를 기억한다.
그녀는 우연히 해변 별장에서 만난 의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문자임을 확신, 의사의 차 속에서 슈베르트의 음악테이프를 찾아낸 뒤 잠든 의사를 묶어놓고 진실의 고백을 강요하는 복수의 고문 극을 벌인다. 물론 의사는 자신의 무고를 항변하고, 변호사 남편은 아내의 살인 충동을 막으려 애쓴다.
한밤의 복수 극이 실제상황인지, 여주인공의 불안정한 심리에서 비롯된 악몽에 불과한지, 의사가 정말 성 고문을 즐긴 악귀인지, 아니면 히스테릭한 여주인공이 착각한 무고한 사람인지 정확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 고문의 파괴성으로 찢긴 희생자의 일상화된 고통이다.
극도로 불안한 여주인공의심리를 재주 많은 중견여배우 김성녀씨가 혼신의 연기로 표현해낸다. 의사 역은 국립극단의 중견 권성덕씨, 남편인 변호사역은 중후한 연기자 신구씨가 맡았다. 14일까지 매일 오후4시30분·7시30분 문예회관 대극장. 743-7828.<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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