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5900m에서의 오후, 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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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캠프에 들어온 지 딱 보름째 되던 4월 13일 오전 7시, 베이스 캠프의 라마제단 앞이 부산했다. 엄 대장을 비롯해 9명의 대원이 제단 앞에 쌀을 뿌리며 등반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며칠간 내린 폭설로 그 동안 등반대원들은 베이스 캠프에서 시간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눈이 그친 12일 밤 엄 대장은 “내일 전 대원 캠프1 등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빙탑 지역을 지나 설원을 오르고 있는 대원. [전 사진 촬영 및 제공 : 정동영(35) 원정대원 ]

라마제단 앞에 선 대원은 기자까지 10명, 곧 바로 빙하지대에 진입했다. 얼음 덩어리와 바위가 켜켜이 쌓여 ‘얼음 너덜지대’로 이뤄진 로체 빙하(Lhotse Glacier)는 하얀 눈 세상, 로체 남벽 또한 시커먼 바위는 보이지 않고 온통 설사면이다.

오전 8시, 로체 남벽 동쪽에 있는 아일랜드피크(6180m)를 넘은 햇살이 빙탑 끝자락에 걸려 있다. 대원들은 빙탑 사이를 지그재그로 건너 첫 번째 크래바스 지점에 도달했다. 거대한 판석과 빙탑 사이에 3m 정도 벌어진 크래바스에는 남체에서 가져온 4m 짜리 알루미늄 다리를 놓았다. 하지만 사다리를 놓았어도 상단 5m 높이의 암벽은 등강기(절벽을 오를 때 로프에 걸고 손쉽게 오를 수 있는 등반 장비)를 이용해 올라야 한다.

캠프1을 열발짝 앞에 두고 악전고투 중인 기자(앞)와 신동민 대원.

모두들 등강기와 하강기가 달린 안전벨트와 헬멧, 이중화로 중무장했다. 기자도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등반 장비를 완벽하게 착용했다. 배낭에는 카메라와 렌즈, 물통, 방한복, 비상식량 등 6~7kg의 장비를 넣었다. 등반 경험이 없는 기자가 해발 5000m 이상에서 6~7kg의 배낭을 짊어진다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다. 신동민(33) 대원이 기자의 뒤를 봐주며 올라갔다. 신 대원은 이번 원정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캠프1을 구축하고, 캠프2 중간 지점까지 루트를 개척한 장본인이다. 기자는 졸지에 ‘특급 용병’을 등반 가이드로 고용한 셈이다.

5300m 지점부터는 등강기를 이용해 가야만 했다. 흔히 ‘주마’라고 불리는 등강기는 고정 로프에 연결해 쓰는 장비로, 앞 부분에 이빨같이 생긴 집게가 있어 위로 밀어 올려질 뿐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경사가 높은 지점을 올라갈 때 한 손으로 등강기를 밀어 올린 다음, 힘껏 잡아당겨 몸을 한 발짝씩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5600m 지점쯤 된 곳이었다. 베이스캠프에 들어온 이후로 가장 큰 눈사태가 사면에서 오른쪽으로 200여m 떨어진 지점에서 일어났다. 천둥 소리를 동반한 눈사태는 설사면에서 빙탑, 빙하지대를 지나 일부 눈가루가 베이스캠프의 텐트 지붕에까지 날라갔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눈사태가 대원들이 오르고 있는 사면에서 벌어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니 소름이 쫙 끼친다.

해발 5700m를 넘어서니 시계는 벌써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다. 5시간 동안 올랐지만, 아직도 1시간 넘게 올라가야 한다. 설사면에 깔린 고정로프에 몸을 의지한 채 끝없이 올라가야만 하는 산행은 정말 고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7000m, 8000m 이상에서 이런 일을 반복하는 등반가들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로 머리 속에는 ‘앞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나지 않는다.

로체 빙하 너머 보이는 아마다블람 피크.

마지막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나가니, 멀리 캠프1이 설치된 바위가 보인다. 불과 열 발짝을 남겨놓고, 엄홍길 대장을 포함한 전 대원이 텐트를 나와 기자를 향해 환호성을 질러준다. 오후 2시 30분이다. 무려 7시간 30분 동안 꼬박 올랐다. 캠프1 사이트는 정말 비좁았다. 거대한 암벽과 암벽이 맞닿은 비좁은 공간에 2인용 텐트 2동과 텐트 덮개 1개만이 겨우 자리를 잡고 있다. 텐트 위로는 셰르파들이 걸어놓은 룽다(깃발)가 펄럭이고 있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기자까지 모두 10명이 확보 줄(Self Belay)에 의지해 벽 사면에 매달려 있자니, 캠프1 사이트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떼는 것이 아슬아슬 할 정도다.

그러나 암벽에 등을 기대고 내려다보니, 눈이 아른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다. 시선은 발 아래 깎아지른 절벽에서부터 로체 빙하를 지나, 저 멀리 아마다블람(6812m), 메라피크(5817m), 촐라체(6501m) 정상과 눈높이를 같이 하고 있다. 왼편으로 보이는 히말라야 연봉에 둘러 쌓인 아일랜드피크(6160m)가 아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압권은 굽이치는 로체 빙하(Glacier)다. 얼음과 바위, 그리고 험악한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로 이뤄진 빙하는 흰 눈을 뒤집어쓴 채 쿰부 히말라야를 향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해발 5900m에서 누린 호사, 기자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오후의 한때였다.

로체=김영주 기자
사진=정동영 원정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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