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Leisure] 王들은 가고 … 바위 속 피어난 찬란한 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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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출발해 비행기 내에서만 10시간 이상을 보냈다.

스리랑카의 관문인 콜롬보 공항에 내리자 뜨겁고 축축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말 그대로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은 지난해 12월 평화협정을 맺기까지 이런 날씨 속에서 19년간을 싸웠던 것인가. 6만5천명이 희생됐다는 그 지루한 싸움을.

콜롬보에서 출발, 북동쪽으로 달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담불라 석굴사원과 시기리야 요새를 찾아간다. 서부 해안의 콜롬보에서 내륙 중앙의 담불라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라지만 내내 협소한 왕복 2차로다. 1백50㎞를 자동차로 가는 데 평일 5시간, 휴일엔 3시간이 걸린다. 후텁지근한 기후가 시계바늘마저 더디 가게 만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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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바위산 중턱에 있는 담불라 석굴 사원.

불교 신자가 전체 국민의 69%인 이곳에서 사원은 순례지나 다름없다. 신자들의 불교 집회 참가를 위해 매월 보름날을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신심(信心)이 높은 나라 아닌가.

현지인들은 기슭에서 신을 벗고 산을 오른다. 외국인 여행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사원 입구엔 신발을 맡아 보관해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밑에 외벽을 하얗게 칠한 회랑이 나타난다. 회랑 안에 바위산의 동굴을 깎아 만든 석굴 다섯개가 숨어 있다. 암벽 밑 움푹 파인 어둠 속에는 1백60여개의 석불이 모셔져 있다. 외부에서 돌을 가져와 만든 석불은 없다. 하나하나 동굴 속의 자연석을 깎고 다듬어 만들었다.

이 중 3개의 석굴은 기원전 1세기에 조성됐다. 남인도의 침략을 받은 스리랑카 왕조가 당시 수도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나 66㎞ 떨어진 담불라로 도망쳐왔다. 이곳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은 왕은 수십년 뒤 수도를 되찾게 되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곳에 석굴을 만들어 승려들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계속 북동쪽으로 달려 시기리야를 향한다. 담불라에서 22㎞ 거리다.

시기리야. 사자를 의미하는 '싱하'와 '산'을 의미하는 '기리얀'이 합쳐진 말이니까 '사자산'이란 뜻이다. 스리랑카인 중 74%를 차지하는 싱할라 족은 스스로를 사자의 후예라고 믿는다. 그러고 보니 스리랑카 국기의 한복판에도 칼을 든 사자 한 마리가 자리잡고 있다.

시기리야 요새가 위치한 바위산은 해발 3백77m. 멀리서 본 이 산의 비탈은 수직에 가깝다. 그곳 어디에 요새가 있다는 것인가.

기슭에서부터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 올랐다. 산 허리에서 어느 순간 땅이 평평해지며 땅을 힘차게 누르는 듯한 사자의 발 두개가 나타난다. 어른 키 두배 높이의 사자 발 사이로 다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견고한 회반죽으로 빚은 사자 발은 요새로 들어가는 출입구다. 돌계단은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나선형의 철 계단으로 연결된다. 철 계단 없던 예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이곳을 올라갔을까 궁금해진다.

1천5백여 년 전 싱할라 왕조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 카샤파가 정실 혈통으로 왕통을 이을 것이 확실시되던 이복 동생 모갈란을 몰아내고 왕좌에 올랐다. 카샤파는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 하며 아누라다푸라에서 80㎞ 떨어진 이 산으로 궁전을 옮겼다. 그리고 싱할라 족의 상징인 사자를 커다란 상(像)으로 만들어 요새 입구를 지키게 했다.

인도로 도망쳤던 모갈란은 18년 만에 군대를 모아 쳐들어왔다. 의기양양하던 카샤파는 요새에서 내려와 진열의 선두에서 동생의 부대를 맞았다. 공교롭게도 카샤파가 탄 코끼리가 길을 잘못 잡아 늪에 빠졌다.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코끼리가 돌아서는 순간. 뒤에 있던 병사들은 왕이 싸울 뜻을 잃고 도망친다고 생각하고 우르르 흩어져 버렸다. 혼자 남은 카샤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가파른 비탈을 올라 바위 산의 정상에 섰다. 1천2백㎡에 이르는 널따란 벌판이 펼쳐진다.

벌판 바닥에 가득 박힌 벽돌이 궁전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벽돌을 쌓아 만든 수조와 연못, 산책로 등이 남아 있다.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쌓은 궁전 외벽은 바닥 부분을 제외하고는 사라졌다.

어느새 따라와서 가이드를 자처한 현지인이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며 왕이 앉아 무희들의 공연을 감상했다는 돌 평상 위에 앉아 기념 사진을 찍으라고 권한다. 권력욕 때문에 동생의 왕좌를 빼앗았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친 왕의 평상에 앉아 사진을 찍는 기분이 묘했다.

담불라의 보은(報恩), 그리고 시기리야의 배반과 무상함. 마음이 착잡해진다. 하지만 바위산 주변으로 사방을 뒤덮은 밀림의 시원함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바위산을 지키던 사자는 언제 다시 포효할 것인가. 사자산 정상 위로 덥고 습한 바람이 드세게 불어온다.

시기리야(스리랑카)=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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