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라의KISSABOOK] 풀잎과 짝꿍, 바람과 어깨동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황사에 아린 눈 비비느라 아까운 봄날이 흘러가고 있다. 팍팍한 생활에 쫓겨 이 눈부신 봄에 아이 손잡고 꽃구경 한 번 못 간 엄마들! 오늘은 눌린 마음 풀어놓고 흐드러진 꽃비의 향연을 즐겨보면 어떨까.

유용성의 가치 척도로 따지자면 시인만큼 불필요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정치가는 필요하다. 의사.농부.법관.상인.운전기사.교사… 거의 모든 직종의 사람들이 세상사에 절실히 필요하다. 시인은 다르다. 시집이 일시에 지구상에서 몽땅 증발한다 해도 내일 해는 어김없이 떠오를 것이고, 지구 곳곳의 일상은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다. 공룡은 멸종됐지만, 시는 건재하다. 광속의 시대가 와도 진화할 줄 모르는 미련한 시는 무관심 속에서도 질기게 살아남아 인류의 곁을 지키고 있다.

오늘 아이와 함께 팬둥팬둥 동시를 읊어보자. "나는 풀잎이 좋아, 풀잎 같은 친구 좋아/ 바람하고 엉켰다가 풀 줄 아는 풀잎처럼/ 헤질 때 또 만나자 손 흔드는 친구 좋아/ 나는 바람이 좋아, 바람 같은 친구 좋아/ 풀잎하고 헤졌다가 되찾아온 바람처럼/ 만나면 얼싸안는 바람 같은 친구 좋아." 정완영 시인의 동시집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사계절)의 일부이다. 노시인의 청량한 시심에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노시인은 한 단어면 끝날 '어머니'를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 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라고 읊는다. 가슴에 얼룽얼룽 눈물 배게 하는 힘, 그게 바로 시다.

이번에는 꿈결에 스쳐간 동무의 아른아른한 손짓 같은 동시를 읽어보자. "자전거 잃어버린 지/ 일주일이 지나도/ 나는 잃어버린 자리를/ 날마다 찾아간다/ 함께 달리던 길을/ 혼자 걸어서 돌아오며/ 훔쳐 간 사람한테 욕한다/ 그러다 얼른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일이라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려던 그 사람이/ 영영 갖다 놓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도 욕하지 않기로 했다." 지리산 간디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호섭 시인의 '놀아요 선생님'(창비)을 읽다보면 지도에 없는 먼, 먼 나라에서 날아 온 엽서를 품고 있는 기분이다.

아이 앞에서 평론가인양 시를 해부하는 지적 허영은 과감히 생략하자. 그냥 더불어 느끼며 즐겨보자. 학교로, 학원으로 팽이처럼 돌던 아이들뿐 아니라, 오래전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엄마의 동심까지 파르스레하게 살아날 것이다. 대상연령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어린이와 어린시절 꽃비의 추억이 그리운 엄마들.

임사라 <동화작가> romans828@naver.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