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새콤달콤책읽기] 북유럽 끝자락의 시골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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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해가 지지 않는 긴 밤, 눈 덮인 삼나무 숲, 꽝꽝 언 채 넓게 펼쳐진 호수…. 동아시아의 우리는 지구의 끝을 상상할 때 흔히 북유럽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를 어쩔 것인가. 북유럽 시골마을 파얄라의 꼬마들은, 세계의 끝을 상징하는 장소가 '중국'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파얄라? 그런 지명도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지는 마시라. 세상엔 우리가 아는 마을이름보다, 모르는 마을이름이 수백만 배 더 많다. 지금 아는 사람보다 앞으로 알아갈 사람이 훨씬 더 많듯이.

파얄라는 스웨덴의 북쪽 끝, 핀란드와의 접경지역인 토네달렌에 있다. 행정구역 상으론 스웨덴 국민인 그곳 주민들은 '메엔키엘리'라는 핀란드어 방언을 쓴다. 스웨덴 사람도 아니면서 스웨덴어로 말하고 핀란드 사람도 아니면서 핀란드어로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유년기는 결핍의 시절이었다. 정체성 결핍. 우리 조상은 스웨덴 역사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변방이며 경계인 그곳에는 디즈니랜드 같은 테마공원, 왕자님과 공주님이 사는 으리으리한 성이나 대저택도 없다. 대신 그 마을에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모기들과 벌목꾼가장들, 그리고 로큰롤에 심취해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어린 소년들이 살고 있다.

파얄라 출신의 작가 미카엘 니에미가 쓴 이 사랑스런 소설 '로큰롤 보이즈'(정지현 옮김, 낭기열라)를 읽고 있으면 그동안 한 번도 의식해보지 못했던,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줄만 알았던 1960년대 북유럽 시골마을의 정경이 눈앞에 저절로 그려지는 듯하다.

정말 재미있는 건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을 맞아 천지사방에 흩어져 살던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 '토네달렌의 비옥한 자궁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명백한 찬사'를 보내고 그러다가는 갑자기 유산 분배를 놓고 티격태격한다. 노총각 삼촌의 결혼식은 졸지에 두 집안의 힘을 겨루는 팽팽한 접전의 장으로 바뀌고, 소년들은 미국의 사촌이 선물한 비틀스의 음반을 처음 듣는 순간 얼이 빠져버린다.

파얄라의 소년에게 '로큰롤'이라는 단어는 '로스큰, 롤, 무시스' 라고 발음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음악은 그저 음악일 뿐이니까. 비틀스를 들으며, 메아리치는 고요 속에 누워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소년에게 무슨 재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보편성의 힘이야말로 일견 소박한 청소년 소설로 보이는 이 작품을 스웨덴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전 세계 30개국에 번역 출간되어 호평을 받도록 한 원동력일 게다. 비틀스를 한번 들은 사람은 절대로 그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마법! 음악이란 그런 것이고, 삶이란 그런 것이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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