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역사·문화 체계적 규명|김해시 대성동 고분군 유물 발굴의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경남 김해시 대성동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철기·목곽 등 유물 7백여점은 1∼3세기 가야시대의 문화를 밝혀줄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본지 2월 29일자 17면, 일부지방 1일 보도)
또 일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벽옥제옥장 1점과 환호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된다.
조사단은 1∼3세기의 목관묘를 확인함으로써 대성동 유적은 1세기 전후부터 5세기에 걸쳐 형성된 지배집단의 묘역으로 추정했으며 구사국에서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
이번에 발굴된 목관묘는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판재로 조립한 형태여서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창원군 다호리 목관묘의 통나무 형태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어 우리나라의 목관이 통나무 목관에서 판재목관으로 전환하는 시기는 기원전 1세기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와 함께 목관묘 이후의 묘제인 목곽묘를 비롯, 수혈식·횡구식·횡혈식 석실 묘들이 7세기까지 계속 축적되었다는 가설을 세웠다.
석곽 구조를 가지고 있는 지석묘 1기도 출토됐는데 주변에서 나온 무문토기편·반월형 석도 등과 함께 대성동 유적이 선사시대부터 분묘 지역 또는 주거 지역이었을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1∼3세기대의 목관묘에서 와질토기가 다수 출토돼 금관가야 이전 구사국시대의 토기문화는 와질토기가 주류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무렵 토기 문화의 계보·변천 등을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칠기는 1∼2세기대 목관묘에서 다수 출토됐는데 이것은 당시 칠기 및 토기들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시사해 준다.
유물 가운데 특이한 것은 벽옥제옥장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 출토됐는데 4세기대 일본고분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벽옥제옥장은 대체로 4세기대 왕의 신분만 소유할 수 있는 물품으로 이것이 일본제로 판명되면 당시 금관가야 지배집단과 왜의 지배집단과의 교류에 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밖에 깊이 70cm, 너비 1∼2m정도의 환호도 파괴된 채 발견됐다. 외부 침략을 막기 위해 주거지 외곽에 호를 파고 목책이나 울타리를 설치해 만든 집단 방어 시설인 환호는 당시의 취락 구조와 사회 발전 형태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사단 책임자 신경철 교수 (경성대 사학과)는 『환호의 축조기로 보이는 기원전 2∼1세기부터 구사국의 중심지로 취락이 형성됐다가 금관가야의 형성기인 3세기 후반부터 분묘 유적으로 바뀐 것 같다』며 『이번 발굴을 통해 대성동 유적이 초기 가야시대부터 전성기의 가야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상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종합 유적임이 다시 확인됐다』고 평가했다. <김상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