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도움 못 받는 이 이렇게 많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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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법원이 올 2월 선발한 21명의 국선 전담 변호사 중 홍일점인 김정윤씨가 재판을 마치고 서울중앙지법 정문을 나서고 있다.김경빈 기자

"돋보기 하나만 사다 주구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피고인 이모(60)씨가 말문을 열었다. 자신의 변론을 맡은 국선 전담 변호사인 김정윤(32.여)씨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책이 너무 읽고 싶은데 잘 안 보여서…"라며 이씨가 말끝을 흐렸다. 김 변호사는 11일 돋보기를 사 들고 이씨를 접견하러 갔다. 김 변호사는 2월 대법원이 뽑은 21명의 국선 전담 변호사 중 홍일점이다. 올해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초보'다.

김 변호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모르고, 변호사로서 어떻게 일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배우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 "도움 받을 기회조차 모르다니…"=피고인 이씨는 40년간 아홉 번이나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주로 절도와 폭행 혐의다. 김 변호사가 맡고 있는 32건의 형사 사건 중 하나다. 김 변호사는 "20대 초반 동네 형들과 함께 물건을 훔치면서 망을 보다 붙잡혀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교도소 안에서 내기 바둑을 두다가 싸움을 해서 징역 2년이 추가되는 식으로 형량이 무거워져 복역 기간만 20년이 됐다. 이씨는 이제 자신의 변론에는 관심도 없다. 돋보기를 사다 준 이 변호사가 고마울 뿐이다.

김 변호사는 최근 1심에서 실형 선고를 받은 정모(32)씨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이끌어 냈다. 국선 전담 변호사로 처음 받아낸 승소 판결이었지만 기쁨보다는 착잡한 심정이 더 컸다. 죄를 졌더라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정씨는 휴대전화 개인 정보를 유출한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세 살 난 딸과 돌을 앞둔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분유 값'을 벌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당연히 변호인을 구할 수 없는 처지여서 김 변호사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김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정씨의 아내가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씨의 아내는 "우울증 진단서를 떼자"는 김 변호사의 말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흐느끼기만 했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만든 제도에 아무 기대를 걸지 않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 "사람 냄새 나는 일을 하고 싶다"= 김 변호사는 덕성여대 제약학과(94학번)를 졸업했다. 약사 생활을 하다가 "사람 냄새가 나는 일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대학 시절엔 모 대학 주최 가요제에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로 참가해 상을 받기도 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남편 문병화(공익법무관)씨와 결혼했다. 김 변호사는 "지내 온 삶이 다르면 생각도 다르지 않겠느냐"며 "다른 생각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shyun@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 국선 전담 변호사제=미성년자나 70세 이상의 노인.심신장애인이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경우이거나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는 피고인을 위해 법원에서 변호사를 선정해 주는 제도. 현재 50여 명이 활동 중이고 월 800만원의 보수를 받으며 2년 계약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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