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회의 개헌 유보 건의, 대통령이 수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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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회 원내대표 6인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개헌 발의를 유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합의문에서 "개헌 문제는 18대 국회 초반에 처리한다"고 시한까지 명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문재인 비서실장은 "각 당이 차기 정부, 차기 국회의 개헌을 당론으로 결정하고 책임 있게 약속할 경우 개헌 내용과 추진 일정에 대화하고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다수가 현 정권 아래서의 개헌에는 반대하고 있고, 국회가 한목소리로 유보해 줄 것을 건의했으니 노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중단하는 게 순리다.

정치권의 이번 합의는 한나라당.열린우리당.민주당.민노당.국민중심당 등 5개 정당과 통합신당모임 원내대표가 모두 동의한 것이다. 사실상 정치권 전체의 합의로 볼 수 있다. 각 당의 원내대표나 대변인이 부연설명하는 성의도 보였다. 노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문제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고 무시한 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해 예의와 모양새를 갖춰 건의한 것이다. 정치권이 나름대로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당론으로 결정하라"느니 "정당 간 합의를 통해 국민에게 책임 있게 약속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느니 하면서 사족을 달고 있다. 꼬투리를 잡아 개헌 불씨를 계속 살려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건 국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이래서는 대통령과 국회의 갈등만 커진다.

개헌은 국가의 기본 틀을 바꾸는 문제이기에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했지만 5년 단임제와 정.부통령제, 내각책임제와 이원집정부제 등 다양한 주장과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의견 수렴이 필요하다. 4년 연임제가 마치 지고지선의 권력구조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건 어불성설이다.

원내대표들이 개헌 유보 건의를 비롯, 국민연금법.사학법.로스쿨 법안의 타결에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신선하다. 철천지원수 대하듯 상대방을 공격하고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에 국민은 넌더리를 내고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나 민생과 관련된 법안은 정당과 상관없이 의견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모처럼 정치권이 정치력을 발휘해 개헌 발의 유보를 건의했으니 대통령도 대통령다운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대통령도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고 국회도 제대로 된 정치를 만들어갈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은 한.미 FTA 체결과 국민연금법 개정에 대통령과 정치권이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할 시점 아닌가. 적정한 수준에서 한 발씩 물러설 줄 아는 게 '윈-윈'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