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압·허위 파문 잦아 "가시방석"-국과수 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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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각종 감정과 분석을 통해 범죄수사와 관련된 근거에 대해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소장은 국내 과학수사 기술의 최고 지휘자라 할수 있다.
국과수는 국가에서 공인하고 있는 유일한 범죄수사 감정기구로 그동안 주위여건상 불모지나 다름없는 법의학 및 개인식별·증거채취기술 등 과학수사 학문을 거의 단독으로 개발·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독보적인 감정기관으로서 국과수의 공신력과 권외는 위압·허위감정의혹이 번번이 제기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돼 「상처」를 입어온 것이 사실이다.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법의학1과장 황적준 박사가 일기 공개를 통해 폭로한 치안본부의 이 사건에 대한 축소 기도는 실제 얼마만한 외부압력이 있어왔는지를 가늠케 해주었다.
또 이번 김형영 문서분석실장의 뇌물수수사건은 감정을 둘러싼 회유·유혹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불모지 일궈내>
「연구소」란 어감과는 달리 국과수의 판정결과는 첨예한 이해관계에 얽혀 때론 사회·정치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던짐으로써 소장의 자리는 「바늘방석」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과수 소장의 외상과 권한은 성격상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 업무보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나 과학수사의 발전과 더불어 확대되어왔다.
현재 국과수의 법의학은 머리카락·혈액·정액 등에서 채취한 유전자로 시체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있고 지문의 감식도 레이저광선을 이용한 검출방식까지 도입돼있다.
개인식별기술도 유골로 신원을 밝혀내는 슈퍼임 포즈방법까지 활용돼 89년1월 경기도화성의 여자 어린이 살해사건을 해결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으며 성문감식의 경우 첨단장비로 87년 원혜준양 유괴살해 사건을 해결하는 등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같은 과학수사의 발전은 수사에 미치는 국과수의 영향력과 직결돼 수사를 주도하는 수준까지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공신력」을 쌓는 계기로 볼수 있다.
그러나 각종 수사제도가 외국과는 달리 국과수에 독립성이 결여돼 소장은 외부기관의 감정의뢰에만 응하고 그 감정결과를 통보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면 부검결정권의 경우도 우리나라는 수사주체인 검사에게 부여돼있으나 일본은 검사 지휘에 따른 공정성의 논란소지를 없애기 위해 범죄와 관련된 부검은 법의학자에게 결정권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법의학자 문국진씨는 『현재 국과수는 외부에서 감정의뢰가 있어야만 감정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외국의 경우는 감정기관이 증인소환권·증거채취권을 갖고 있다며 원활한 감정업무를 위해 이같은 권한이 주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대우=지난해 5월 직제 개편으로 국과수 소장의 직급은 의무·보건·공업·물리기감(2급) 또는 부기감(3급)으로 보하도록 되어있다.
그 이전 보건기감 또는 부기감으로 되어있었으나 과학수사의 영역이 그만큼 확장되고 있는 추세에 맞춘 것이다.
이에 따라 급여는 일반공무원 2급과 마찬가지로 월 본봉 89만3천원과 판공비 30만원정도이며 그 외에 각종 수당이 더해진다.
대외적으로는 지난해 8월 경찰청 독립과 함께 치안본부장 산하에서 벗어나 내무부장관 직속으로 바뀌어 내무부장관에게 중요업무에 관한 보고를 하도록 돼있다.

<내무장관 직속>
그러나 내무부가 실질적인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어 사실상 적절한 지휘·감독을 받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다.
이 때문에 이번 뇌물수수사건을 계기로 내무부보다는 전문성을 갖고 보다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른 기관소속으로 직제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히 경찰은 그동안 국과수를 관할해온 「기술축적」을 근거로 경찰청장에게 지휘·감독권을 맡기는 내용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운영규칙」을 내무부 훈련으로 제정할 것을 건의해 놓고 있으나 국과수의 독자성 침해우려 등의 반론도 만만치 않아 결과는 미지수다.
어쨌든 국과수 소장은 경찰과 업무상 95%이상 밀접 되어 있고 국과수 총무과장은 경찰관 (총경)으로 임명되도록 되어있어 실제 경찰의 업무지시를 받기도 한다.
대내적으로는 각 연구원들이 수행하고 있는 감정업무에 관여하지 않지만 보고를 받고 직원들을 지휘·감독함으로써 궁극적인 책임을 진다.
강신몽 법의학과장은 『감정결과에 대한 책임은 연구원과 과장·실장에 국한되는 것이 상례』라며 『그러나 소장은 감정의 절차·시기 등을 지휘·감독사실상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역대소장=55년 국과수발족이후 지금까지 소장을 역임한 사람은 모두 5명으로 이들은 모두 의학·약학전공자들.
「과학성」과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의 연구소에서 다년간 근무한 연구원이 자체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대 소장을 지낸 유영우씨는 41년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한 뒤 광복직전 경기도 경찰병원에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그 뒤 줄곧 우리나라과학수사 기구 설치작업의 선두역할을 해냈다.
46년 경무부 수사국 법의학실험소장을 거쳐 이후 신설된 내무부 치안국 감식과장을 역임하고 경찰신분으로 경무관으로 승진한 뒤 초대소장에 올랐다.
유씨는 『당시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법의학에 전념하게 된 것은 나름대로 관심도 있었으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유소장은 민주당 정권 때인 60년11월 3·15부정선거와 관련된 투표용지 직인의 감정이 물의를 빚어 부하직원에 대한 책임으로 퇴임하고 20여일간 구속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나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부정선거의 투표용지 직인에 대해 「감정 불능」으로 판명했다가 정권이 바뀌면서 책임을 지게된 것이다.

<큰 사건 해결도>
퇴임 후에는 일본경도부립 의과대학 법의학 교실 객원 강사를 지내고 국내 치안문제연구소 이사를 맡는 등 과학수사연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소장이 퇴임한 뒤 후임발령이 곧바로 나지 않아 당시 법의학과장이었던 최진씨가 소장직무대행을 맡다가 5·16이후 61년11월에 1년 기간의 단명으로 물러났다.
2대 소장을 역임한 우상덕씨는 48년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하고 경무부 수사국 법의학 실험소 근무 경찰관으로 과학수사 분야에 입문했다.
이후 우씨는 경무관으로 승진, 충남도경국장·치안국 보안과장 등 경찰간부로 활동하다 61년11월 국과수 소장에 취임, 69년5월까지 8년6개월간 비교적 장수했다.
65년 당시 시중에 나돌던 부정의약품중에서 합성마약의 일종인 「메사돈」을 검출하는데 성공하여 메사돈사건을 해결함으로써 국과수의 위상을 높이는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3대 오수창 소장은 전임자들과는 달리 의학이 아닌 약학전공자로 충남도립 공주병원 약제과장을 거쳐 국과수 이화학과장을 지낸 뒤 1년여간의 직무대행 후 소장에 앉았다.
오소장 재임당시 71년7월 서울덕성여대 메이퀸이 호텔에서 투신·사망한 사건을 감정, 타살에 의한 사망으로 판정해 일반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고 74년11월 대왕코너화재사건으로 사망한 86구의 시체를 감정, 신원을 밝혀냄으로써 「일하는 국과수」의 면모를 보였다.
4대 이민규 소장은 2대 우소장과 세브란스의대 동기동창으로 법의학과장을 지낸 뒤 그만두고 개인병원을 개설, 운영하다 다시 국과수에 들어와 사령탑을 맡았다.
그의 재임기간에는 각종 강력사건의 감정이 범인검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각광을 받기도 했다.
81년11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윤상군 유괴살해사건에서 실무에 도입된지 1년 정도밖에 안된 거짓말탐지기를 동원, 범인 주영형을 밝혀내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여대생 박상은양 살해사건에서는 승용차 커버에서 발견한 치혼으로 정모군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재판부에서 증거 불충분을 적용,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공신력이 반감됐다.
83년9월 KAL기 피격사건 때는 이소장이 직접 일본 북해도 왓카나이 현지에 출장해 검시업무를 진두지휘, 국과수의 첫 해외출장업무를 기록하기도 했다.
현임 윤중진 소장은 법의학과장을 거쳐 84년7월부터 7년 이상 역임하고 있다.
윤소장 재임기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이철규군 변사사건,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 유서사건 등 그 어느 때보다 시국사건과 관련된 감정의뢰가 많아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정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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