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해치지 않는 경제공약을(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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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거때만 되면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으레 수많은 공약들을 내놓는다. 그 공약들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나라가 곧 선진국은 물론 천국처럼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 같은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
선거의 근대화를 이룩하자면 무엇보다 정책대결이 으뜸가는 득표경쟁수단으로 자리잡아 향응·금품제공과 인신공격·흑색선전 따위를 몰아내야 하는 만큼,주요정책들이 담긴 공약제시 그자체는 장려해야 마땅하다. 다만 유권자들의 평가를 기대하면서 제시되는 정책들은 일정한 기본요건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평가자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예컨대 정당차원의 경제정책은 정책기조면에서 우선적으로 추구할 목표와 그 목표달성을 위한 세부과제들,그리고 과제들의 수행에 필요한 자금조달방법 등의 정책수단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14대 총선용으로 민자·민주 양당이 내놓은 경제공약들 역시 그같은 정책의 기본요건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발표한 듯한 인상을 준다.
양당의 경제공약들은 우리경제의 주요현안과제들,즉 물가안정,국제수지개선,과학기술의 발전,사회간접자본의 확충,중소기업 육성을 공통적으로 약속하고 있으나 어디에 중점을 둘 것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엄밀히 말해 어느 한 부문에도 주름살을 주지 않고 모든 부문을 한꺼번에 다 잘하겠다는 약속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금융실명제에 관해서 민자당이 「단계적 실시」를,민주당이 「조기실시」를 내세웠고 토지공개념제도에 관해서 민자당이 「보완발전」을,민주당이 「확대실시」를 주장하고 있어 얼마간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있으나 이런 정도의 차이를 경제정책의 기조적 차이로 확대 해석하기는 어렵다.
양당이 특히 사회간접자본부문에서 숱한 대형사업들을 약속하고 있으면서도 사업수행의 절대적 전제가 되는 재원조달 방법을 신빙성있게 내놓지 못한 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재원조달방법에 대한 배려가 없이 투자 우선순위와 대체적인 공사일정도 밝히지 않은채 급한김에 선심용으로 약속한 사업들은 대개 공약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반복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다.
그런 사업들은 국민들의 허황한 기대를 부풀려 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곳곳의 땅값을 뛰게 하고 투기를 부추겼던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지역개발과 도로·철도·항만 등의 건설사업이 과도하게 큰 비중을 점하는 양당의 경제공약내용을 보면서 선거후의 땅값이 또 들먹거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경제공약의 내용을 떠나 공약발표의 행태에 있어서 여야간의 심한 불균형은 빨리 시정돼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지방순시를 통해 각종 지역사업을 늘어놓고,거기다 정부 각 부처가 전혀 급하지 않은 미래사업을 때맞춰 흥보하는 낡은 관행을 두고 「통상적인 업무수행」이라고 백번 변명해봤자 그것이 선거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 외국인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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