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창기·후지쓰·SBS 석권|한국 쾌거에 중·일 기계 섬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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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응창기배 우승, 후지쓰배 우승, 동양증권배 우승, SBS속기 전 우승으로 한국 바둑이 그랜드슬램을 이룩, 세계 프로 바둑계를 석권했다. 조훈현·조치훈·이창호와 우리 팀 (조훈현·서봉수·서능욱·유창혁·이창호)이 영광의 주역들이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전적이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뿌듯한 감격을 주체하기 어렵다. 한국 바둑의 연이은 쾌거에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이다. 과거 일본인들은 「두뇌의 스포츠」 바둑을 전 세계적으로 보급하면서 『일본인의 두뇌가 그 어떤 민족보다 우수하다』고 은연중 과시해오던 터였다.
한편 중국도 크게 자극 받고 있는 눈치다. 원래 중국은 우리와 미 수교 상태인데다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4개국 이상 참가하는 국제 대회가 아니면 한국과는 시합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나 앞으로 이 방침을 크게 완화할 움직임이다.
바둑·장기·체스를 총괄하는 중국기원의 원장과 중국 바둑 협회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중국식 포석」의 창시자 진조덕은 북경에 들른 필자와 1시간 동안 요담 하는 자리에서 『우리 중국기사들이 그동안 일본과의 대전에서는 강한 면모를 보여왔으나 최근 한국에는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바둑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각 10명의 프로가 참가하여 매년 교대로 원정,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대국하는 「한·중 바둑 결전」을 갖자』고 획기적인 제안을 하기도.
SBS속기전의 숨은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줄 씨름」방식의 연 승전에서는 선수들의 순번을 정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대국 날 컨디션의 좋고 나쁨도 중요하거니와 승부사들에겐 「거북한」 상대가 있게 마련이어서 더욱 그렇다.
거기다가 우리 선수 5명 중 그 누구도 중·일 기사 10명을 모두 꺾을 수는 없다고 볼 때늦게 출전할 수록 유리한 면이 있어 모두들 고심하는 중에 이창호가 1번 타자를 자원하고 나섰던 것. 자신이 가장 나이 어린 후배이므로 궂은일을 먼저 맡아야 하며 지난날 요다 (의전 기기)에게 진 빚을 갚겠다는 그 충정은 갸륵했지만 우리 팀의 김연 단장은 유창혁을 1번으로 지명했고, 유창혁은 파죽의 3연승으로 우승의 기틀을 다졌으니 이 대목이 바로 「운명의 갈림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프로야구 경기에서도 자원 등판한 투수 치고 실패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며 이창호 역시 또다시 자원, 3번 타자로 나섰다가 1승에 그쳤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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