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사로잡은 김현종 본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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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일 오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에 관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에 앞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악수하며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안성식 기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던 2003년 2월.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별관의 인수위 사무실에서 미팅이 있었다. 김현종 세계무역기구(WTO) 법률자문관과 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대표, 어린 시절을 순천에서 보낸 순천 토박이 미국인 인요한(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씨 등 40~50대 초반의 '젊은 지도자' 그룹 6~7명이 노 당선자와 만났다. 대부분 해외 유학파인 이들은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국가 원수 등 정.재계 지도자들 모임인 다보스 포럼의 '영(young)리더 회의' 멤버들이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이끌어낸 노 대통령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첫 만남에서 노 대통령은 김 본부장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게 참모들의 얘기다. 당시 대통령 의전을 담당했던 서갑원 열린우리당 의원은 "마치 세계 지도를 머릿속에 꿰차고 있으면서 그 위에서 자유자재로 장기 말을 놓듯 세계를 보는 식견과 전문지식이 탁월했고, 특히 전략적 사고가 번뜩였다"고 기억했다.

이날의 기억은 노 대통령의 뇌리에도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해 5월 그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차관보)에 오른다. 노 대통령의 파격 인사다.

김 본부장은 당시 노 대통령에게 한.미 FTA 협상의 필요성과 수순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시장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경쟁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협상에선 이니셔티브(주도권)가 중요하다. 우리가 미국에 FTA를 하자고 먼저 제안하면 주도권이 그쪽으로 넘어간다.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미국 시장의 문을 열게 할 방법이 뭘까. 캐나다를 먼저 치는 것이다. 우리가 캐나다와 FTA를 한다는 얘기를 흘리면 미국이 달려들 것이다. 협상은 자신있다."

그리고 2005년 9월. 해외 순방을 위해 멕시코로 날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결심한다.

동석했던 고위 인사는 "몇 수를 미리 읽는 (김 본부장의) 전략적 마인드가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과 김 본부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은 번뜩이는 아이디어, 판을 읽을 줄 아는 분석력, 전략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데 김 본부장은 세 가지를 모두 갖췄다"고 평했다.

두 사람은 일하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한번 잡은 것은 놓지 않는 집요함과 승부사적 기질이 닮았다.

외교부 대변인 출신인 열린우리당 정의용 의원은 "김 본부장은 정책 결정권자를 설득해 의제설정을 한 뒤 굉장히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소신이 뚜렷해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겁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국회 답변 때도 할 말을 다 하는 형이다. 발언 기회를 주지 않으면 "잠깐만요. 이건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요"라고 해 발언 기회를 얻는다. "노 대통령과 닮은꼴"이란 얘기를 듣는 이유다. 이런 스타일 탓에 때론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관료사회에서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노 대통령과 김 본부장은 2003년까지 일면식도 없었다. 두 사람이 걸어온 길도 너무 다르다. 김 본부장은 외교관(김병연 전 노르웨이 대사)의 아들이다. 중.고교, 대학을 해외에서 다녔고 석.박사도 미국(컬럼비아대)에서 마쳤다.

국내엔 학맥이나 인맥이 없다.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한국으로 건너온 김 본부장은 1998년 홍익대 교수에서 외교부 통상전문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의 일하는 모습을 본 외교부 동료들은 '일벌레'라고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호그룹 수석 법률고문인 김미형 부사장이 친동생이다. 김 부사장 역시 항공기 협상 일을 맡고 있다.

이정민 기자<jm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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