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노브랜드 '브랜드 없는 브랜드' 세계 젊음 꽉 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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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노브랜드 김기홍 사장이 3일 서울 가락동 본사 회의실에서 미국 의류 브랜드 DKNY로 수출할 여성 티셔츠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문규 기자]

노브랜드는 여성의류 전문제조업체다. 말 그대로 '브랜드가 없는(no brand)' 회사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원피스.티셔츠.청바지 등은 DKNY.바나나리퍼블릭.갭.망고 등의 브랜드를 달고 세계 젊은이들에게 팔린다. 지난해 이렇게 해외 브랜드에 수출한 물량은 의류 4000만 장, 매출액은 2020억원이 넘는다.

노브랜드는 단순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회사는 아니다. 이 회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을 도입했다. 바이어가 가져다주는 디자인과 샘플에 따라 봉제만 하는 게 OEM이라면, ODM은 자체 기술로 제품을 기획.디자인.생산하고 품질관리와 출하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진다. 1994년 회사를 세운 김기홍(47) 사장은 "한국은 트렌드를 읽는 감각과 기술이 뛰어나 ODM 방식으로 고급 의류를 만들어 수출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회사를 차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노브랜드도 처음에는 자체 브랜드에 관심이 있었다. 한때 20대 초반 여성을 타깃으로 브랜드를 만들어 백화점에 진출했지만 유통의 벽은 높았다. 자체 브랜드를 접고 ODM에 주력해 내수 없이 100% 수출만 하게 됐다. 김 사장은 "우리 브랜드는 없지만 세계 유명 브랜드는 다 만드는 토털 패션 브랜드"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13년간 매출 성장을 멈춘 적이 없다. 97년 첫 수출에서 500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고, 98년 1500만 달러, 99년 4500만 달러 등 매년 3배씩 성장했다. DKNY.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씨어리.BCBG 등 고급 디자이너 브랜드부터 바나나리퍼블릭.갭 등 대중 브랜드, 타겟 같은 할인점 브랜드, JC페니와 같은 백화점 브랜드까지 다양한 분위기와 가격대의 옷을 납품하고 있다.

◆급성장 비결=노브랜드가 미국 최고의 의류 브랜드들을 고정 바이어로 확보하게 된 저력은 뭘까. 김 사장은 "자체 기획 위주로 운영하기 때문에 연구개발에 많은 비용과 인력을 투입했고,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 거래선을 다양화하고, 빠른 생산체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매출의 2%를 연구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매년 50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중견기업으로 드물게 미국 뉴욕에 디자인센터를 뒀고, 지난해에는 명품 브랜드 랄프로렌과 케네스 콜에서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필립 리밍을 영입했다. 자체 원단 실험실과 섬유기술연구소도 있다.전사적 자원관리(ERP)시스템과 전자결재 시스템을 도입해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했다. 여러 나라에 있는 노브랜드의 지사들은 역할 분담이 뚜렷하다. 서울 가락동 본사는 원단 소재를 결정하고, 트렌드 분석과 디자인을 해 바이어에게 제안한다. 중국 상하이 지사는 원단과 부자재를 구매하고, 생산은 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 공장에서 한다.

김 사장은 요즘 "물건을 더 만들어 달라"는 주문에 시달리고 있다. 초창기 욕심이 앞서 주문을 많이 받았다가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 주문을 거절하느라 고생이다. 그는 "매년 20~50%씩 생산 능력을 늘릴 방침이며, 이를 위해 1000만~2000만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양 회사는 있어도 사양 산업은 없다=김 사장은 학창시절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에도 옷 가게들을 기웃거렸고 디자인을 공부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는 "옷을 보는 감각은 있으나, 창의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DKNY에서 일하는 친구로부터 옷 샘플을 제작해 보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의류 사업에 뛰어든 90년대는 높은 인건비와 비용부담 증가로 국내 의류.섬유 산업이 위축되고 있었다. 많은 회사가 업종을 전환하거나 생산기지를 중국과 동남아로 옮길 때였다. 하지만 그는 "사양 회사는 있어도 사양 산업은 없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옷을 만드느냐가 문제지, 옷 자체의 전망이 나쁘진 않았죠." 김 사장은 "요즘 인기있는 H&M이나 자라, 망고 같은 실용적인 브랜드도 화려해져 우리처럼 유행에 민감한 옷을 만드는 회사가 강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럽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올해 벌써 2억7000만 달러(약2565억원)어치를 수주했다. 보통 연초 3개월 안에 한 해의 주문이 80%이상 완료된다. 그는 "더 좋은 회사가 돼 직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노브랜드'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외국 유명 브랜드를 사고 싶다"는 것이 사업 제2막의 구상이다.

글=박현영 기자<hypark@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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