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전직 정보기관원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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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가 2.13 북한 핵 합의 이후 북한의 전략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을 비판하며, 공개 토론을 제안해 논란이 예상된다. 당사자는 정영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62).

정 교수는 1968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공채 5기로 중앙정보부에 입사한 뒤, 대북 및 해외 분야에서 활동하다 지난 1999년 퇴직했다. 현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와 행정대학원에서 '국가 안보와 정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정 교수는 A4 용지 8쪽에 달하는 편지를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에게 발송한 데 이어 자신의 수강생들에게 편지 내용을 두고 토론을 제안했다. 편지의 골자는 '2.13 합의로 북한이 자신들의 기존 전략목표를 수정해 핵을 포기하고 개방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은 순진한 믿음'이라는 것. 북한 정권은 '민족해방 인민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진보 내지는 감상적 민족주의' 정권의 탄생을 통해 여전히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 막기 위해 정 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두 가지. 현재와 같이 북한 문제를 두고 여론이 갈려서는 안 되며, 여론 지도층의 각성을 토대로 국민의 행동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와 함께 새로운 지도자는 통합형이며, 섬세한 지도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편지에서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비관적 견해가 있다거나 소위 축제 분위기에 '초'치는 심정은 아니다"고 밝혔다. 그의 주장은 보수 진영과 맥을 같이 하지만 해법은 보수 진영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정 교수는 이 편지에 대해 "오랫동안 북한을 상대해온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현재 전략을 분석해보자는 것일 뿐"이라며, 현재의 '보수 꼴통'이나 '좌파'라는 분류를 거부했다.

그가 여론 주도층과 학생들에게 던진 '해묵은' 문제가, 새로운 문제 제기로 떠오를지 될지 주목된다.

이여영 기자


-"2.13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 전략 바뀌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핑크빛 신드롬'에 대한 공개 토론 제안

국민들의 올바른 판단과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애쓰시는 노고에 우선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이 글이 시대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해 사람들의 웃음 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그래도 "네가 보는 바"를 용기 있게 외치라는 마음의 갈등 속에 씁니다.

본론을 말씀 드리기 전에 제 소개부터 드리는 것이 도리인 것 같군요! 저는 68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공채5기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31년간 대북 및 해외분야에서 해외파견관, 해외정보책임자 등을 역임하고 99년 퇴직하여 현재까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행정대학원에서 "국가안보와 정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글은 소위 " 2.13 합의" 후 대한민국에 나타나고 있는 " 핵 및 북한 관련한 핑크 빛 신드롬"에 대한 제 견해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북한과 핵 문제에 비관적 견해를 갖고 있다거나 소위 축제 분위기에 "초"치는 심정으로는 더욱 아닙니다. 다만 그 간의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보는 북한의 대남 전략목표와 관련국 태도 및 정세를 설명 드리기 위함입니다.

상대방의 전략목표는 어디까지나 전략목표일뿐 100%성공의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대처한다면 상대의 기도는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상대방의 전략 목표와 의도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2.13 합의"와 관련한 일련의 북한의 행동과 향후 전개될 행동 방향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북한의 대남 전략을 이해해야 합니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현재까지의 일관된 대남 전략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입니다.

이것은 남측에서 만든 용어가 아니라 북한정권이 모든 대남업무관련 종사자와 공작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교재의 제목입니다.

서신인 관계로 잡다한 설명은 생략하겠으나, 위의 짧은 두 음절(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은 북한의 모든 대남한 태도와 조치의 기본이 되어왔으며, 남한 측의 대북한 대응 역시 이 두 음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족 해방"이란 무엇이냐?

북한은 남한이 일제 해방과 동시에 미국에 의해 강점되어 있어 진정한 민족해방이란 미국의 압제를 끊는 것이며 그를 위한 제1차적 과제는 "주한미군 철수"라고 주장합니다. 오늘 현재까지 북한의 각종 대남 교섭과 대남공작원, 북한에 포섭된 간첩, 친북인물들의 구호 속에 "주한미군 철수"문제가 빠진 적 있습니까?

다음 "인민민주주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개념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들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농민에 의한 통치, 소위 "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진정한 민주주의 입니다. 그리고 남한 정부는 미국의 괴뢰 정부이므로 민족해방과 동시에 타도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초기에는 남한에 지하당을 구축해 이들로 하여금 괴뢰정부 타도를 위한 봉기를 일으킨다는 전략을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소위 "통일전선 전략"으로 전환, 남한 내 제 세력과 연합, 과도기를 거쳐 좌익 정권을 수립한 후, 이들과 연방/연합 과정을 통해 한반도 적화를 완결한다는 전략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대남 전략이 "2.13 합의"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 는 의문의 들것입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등 민주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북한 주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핵개발을 성공시키고 이를 통해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는 수준의 정세를 조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현실화 되는 과정 속에 주한 미국 철수 문제는 자연스럽게 처리될 수 있으며, 북한으로서는정권 수립 이후의 대명제인 두 음절 중 첫 음절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 음절 관련입니다.

북한은 남한 내 민주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통일전선 전략을 마음껏 펼쳐 왔으며 특히 지난 10년간 감상적 민족주의적 정부정책으로 많은 활동 공간과 기반을 확보하였습니다.

북한은 금년 한국의 대선에서 한번 더 "감상적 민족주의 정부"가 탄생된다면 핵 협상과정을 통해 소위 "두 음절"을 동시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정세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작년 말부터 북한이 전례 없는 강경어조로 보수정권의 탄생을 경계해 왔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남한 내 보수 정권의 탄생은 북한이 맞이할 "결정적 호기조성"에 커다란 장애가 조성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북한은 금년에 "진보내지 감상적 민족주의" 정권 탄생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며, "2.13 합의"이행을 위한 협상과정에서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 화해, 협상무드가 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일자조정에도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작금의 사회분위기는 저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보수론 자들의 전형적 주장"으로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현재 상태에서 우리가 힘이 있고 우세해도 상대방의 기도와 주변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하면 패자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국제적으로 은밀 리에 지원 받은 볼쉐비키(소수파라는 의미)가 멘쉐비키(다수파)를 누르고 혁명에 성공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나라는 항상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이 거액의 혁명자금을 레닌에게 제공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입니다.

이왕지사 제 소견을 말씀 드린 김에 우리의 대응방향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 여론 지도층의 각성과 국민계도를 통한 단결된 행동입니다. 사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이러한 북한의도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문제의 특성상 곤란한 문제이며, 또한 북한에 대한 강경 태도는 국제적 호응을 받지 못하고 또 성공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과거 현직에 있을 때도 가장 애로를 느낀 부분이 북한 문제에 대해서 국민들의 잘못된 인식이 있어도 남북문제의 특성상 진실을 적나라하게 밝히고 이해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는 것도 여러분들이 여론 주도층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좀 더 이해하고, 조용한 방법으로 국민여론을 형성시키고 계도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제가 과거에 북구라파 출장 중 현지 파견 관의 안내로 슈퍼마켓에 갔는데, 모든 진열대에 자국산과 EU국가수입품이 동시에 놓여 있고, 자국산 상품가격이 평균적으로 배가 비쌌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은 거의 수입품에 손을 안대고, 배가 비싼 자국산만 구입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까, "국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국산만 구입하고, 수입품 구입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모두 눈총을 주기 때문에 파견관도 그 나라 상품만 구입한다"고 답변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내외적 현실을 외면하고 극단적 반공을 주장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환경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다면서 "자기 스스로 왜? 어떻게? 변화 할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불쑥 감상적 민족주의에 영합하여 정치적 이득이나 보려는 지도층을 보고 있습니다.

먼저 언론과 여론 지도층이 국제조류와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알고, "왜? 어떻게?"를 고민한 후 냉정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국민들을 이끌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금년 말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 될지 심각히 고민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현재 국내적으로 좌우이념갈등, 양극화 심화, 사회모든 분야에서의 구조적 부패 등 분열적 요소가 더욱 심해지고, 주변정세는 핵 문제를 위요한 새로운 질서 재편 움직임 등 우리에게 유리하지 만은 않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년 말 우리의 선택은 이러한 기로의 대한민국을 순항시킬 지도자를 결정합니다.

과거의 지도자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쾌도난마 형으로 밀고 가거나,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측근세력을 많이 확보해 "세"로서,"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수구꼴통", 아니면 "좌파"로 비난하며, 고위관료가 공개석상에서 "세금폭탄/강남집값 비싸면 팔고 이사가라"는 등 한쪽의 질시감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정도로 분열돼있고, 우리의 혈맹인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 변화 여부까지도 예민해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지도자는 이러한 분열적 갈등을 수습하고 아우르는 통합형이고, 미묘한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읽고, 문제를 장기적 안목에서 대처해 갈 수 있는 섬세한(delicate) 지도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서 솔선수범의 모범을 행할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장황한 글이 되었군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은퇴자의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귀하의 건승을 기원 드립니다.

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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