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라국 금동관(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가야유물들은 백제나 신라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신라토기의 꼭지는 대체로 투박하고 두툼하게 올라가는데 비해 가야토기는 중간에 단추처럼 들어가 있는 「단추식」이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출토된 후기가야토기 굽그릇(고배)의 경우 가늘고 긴 굽구멍이 일렬로 배치돼 굽구멍의 위·아래가 서로 엇갈리는 신라고배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고배 다음으로 많이나온 목항아리(장경호)의 경우 신라는 다리가 달리는 예가 많은데 반해 가야는 다리가 없고 따로 만들어진 그릇받침대에 얹혀지도록 돼있다.
금제 귀걸이도 신라것은 하트형인데 반해 가야 것은 펜촉형이다. 이같이 가야와 신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화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김해 패총등에서 출토된 후한시대의 상방경과 일본양식인 이은구연호형토기 등은 가야가 일찍이 해로를 통해 중국무역의 중개지인 낙랑 및 왜와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금관과 금동관은 찬란한 신라금관의 원조다. 고령출토로 전해지는 「가야금관」(국보·호암미술관 소장)의 입화장식은 경주 황남총에서 발굴된 신라금관 양식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신라금관에 흔히 나타나는 출자형입식도 고령 지산동고분과 대구 비산동고분 출토의 가야 금동관에 나타나 있는 양식과 같다.
서기전후무렵부터 562년까지 경상남북도 서부지역에 존재했던 부족국가들의 연맹체인 가야역사는 얼마전까지만해도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연구불모지대의 우리 고대사였다.
가야사는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과 일제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일부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다라국­. 『일본서기』에 나오는 멸망당시 임나십국중의 한 부족국가다. 다라국은 후기가야시대(5세기∼6세기후반),지금의 합천(옛이름 대량 또는 대야)지역에 존재하다가 신라에 합병된 가야소국들중의 하나였다. 후기가야연맹이 맹주는 고령의 대가야였다.
일본사학자들의 한반도 남부지배를 위해 가야에 일본이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임나일본부」가 백제의 군사령부였다는 우리학자들의 학설도 나와 있다. 최근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발굴된 다라국의 금동보관과 은제관 등의 가야유물들은 묻혀진 가야역사연구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이은윤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