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2부] 즐거운 집(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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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내 남자친구는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를 연상시키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긴 머리는 꽁지처럼 묶은 데다가 물 빠진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서점에 딸린 작은 정원에 앉아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이 작가를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

몇 번 얼굴이 마주친 적이 있어서 낯이 익은 그가 처음 내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좀 짓궂은 기분이 들어서 "글쎄요…. 아저씨는 이 작가 좋아하세요?" 하고 물었다. 그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글쎄 10년 전쯤에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읽어봤는데 좀 별로야. 무슨 감정이 그렇게 복잡한지…… 그 뒤로는 읽은 게 없어서" 하고 말했다.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번은 서점에서 엄마의 책들을 읽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다. 우산이 없어서 집에 돌아가기도 어려워서 머뭇거리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그러고는 녹차 한 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마주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녹차를 마셨다. 그와 마주 앉아 멀뚱멀뚱 차를 마시다가 왜 그랬을까, 나는 그에게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엄마는 세 번이나 이혼한 사람이에요. 제게는 두 동생이 있는데 우리 셋은 모두 성이 달라요. 저는 이번 여름에 그런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이곳으로 왔어요."

묻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가 좀 맘에 들었던 것 같다. 아빠에게 연락이 없는 동안, 내게 어떤 부성애의 결핍 같은 것들이 생겨나서, 그에게서 아빠와 유사한 이미지를 발견해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혹시 동화를 자주 지어내는 나머지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는 아이가 아닐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엄마가 참 열심히 사시는 분인가 보구나. " 했다.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엄마가 이혼을 세 번이나 한 것이 열심히 사는 증거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깔깔 웃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웃지?"

"사람을 웃게 만드는 건 대개는 그 말이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을 때니까요. 엄마를 설명하는 데 그 말이 참 맞는 말이거든요. 우리 엄마는 너무 뜨거워요. "

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았다. 낯설고 생경한 것을 들여다보고 싶은 천박한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게 더 내 마음을 끌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가끔 녹차를 마셨다. 독서실에 있다가 엉덩이가 아파오면 나는 책을 독서실에 놔둔 채로 서점으로 갔다. 그는 커다란 물뿌리개를 들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는 별말이 없는 채로 녹차를 얻어 마시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내가 서점에 가서 아저씨와 녹차를 마시고 싶은 건지, 공부하러 독서실에 가고 싶은 건지 헷갈리곤 했다.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한번은 내가 묻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좋아하지, 책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고…. 그래서 술집을 차릴까 책방을 차릴까 고민했었단다. 그런데 술집을 차리려고 생각하니까 술은 일일이 내가 서빙을 해주어야 하잖아. 그래서 각자가 알아서 사가는 책방을 하기로 했지. "

"우리 엄마도 책하고 술하고 둘 다 좋아하는데…. "

내가 말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원래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술도 열심히 마셔. "

그는 입을 열면 열심히, 라는 말을 자주 꺼냈는데 그 자신은 별로 열심히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늘 느릿느릿 책방을 오가며 책의 먼지를 닦고 손님들에게 책을 팔았다. 그는 그 서점이 들어 있는 건물의 이 층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집 안을 청소해주시는 아주머니가 드나드는 걸 보았던 것이다. 한번은 내가 "아저씨는 식구가 없어요?"라고 묻자 그의 얼굴로 아주 짙은 먹구름 같은 것이 덮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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