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지구촌 사람] 1. 린치 일병과 두팔 잃은 이라크 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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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003년도 격동과 파란을 뒤에 남기며 마지막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쟁으로 시작된 올해, 지구촌은 포연과 테러.천재지변으로 얼룩졌다. 그런가 하면 중국인이 우주에 갔고 인류는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을 물리쳤으며 세계경제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대사건의 현장에서 세계인의 눈을 붙잡았던 인물들을 통해 떠나가는 해를 되돌아본다.

이라크전쟁은 공격한 쪽과 공격당한 쪽 모두를 희생자로 남겼다. 4백40여명의 미군과 1만5천여명의 이라크 군인.민간인이 죽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명분이 무엇이든 전쟁은 운없는 개인에겐 치명적인 비극이다. 이라크의 열세살 소년 알리 이스마일 압바스와 미국의 제시카 린치 육군 일병은 대표적인 비극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꿋꿋한 의지로 비극을 넘어서 새로운 인생을 다져나가고 있다.

지난 3월 30일 밤 바그다드 외곽 마을에 있는 알리의 집에 미군의 '오폭 미사일' 두 발이 날아들었다. 섬광이 스쳐가던 찰나의 시간에 알리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아버지.어머니.형제.자매 등 13명의 일가 친척이 현장에서 숨졌다. 알리는 파편에 맞아 두 팔이 너덜너덜해졌고 전신의 3분의 1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바그다드의 한 병원에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누워 있는 알리의 모습은 4월 초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세계인은 전쟁이 가져온 민간인의 참상에 다시 한번 전율했다.

알리는 영국장애인협회의 도움으로 영국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알리는 지금 오른쪽 어깨에 물건을 집을 수 있는 첨단 로봇팔을 달았고 왼쪽 팔에는 의수를 끼었다. 한때 알리의 소원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507정비중대의 열아홉살 린치 일병은 알리보다 며칠 앞선 3월 23일 나시리야 전투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다가 지옥을 겪었다.

이라크군의 매복공격으로 동료병사 11명이 숨졌다. 린치가 탄 차량이 뒤집어지면서 린치는 팔다리가 마구 부러졌다. 포로가 된 린치는 이라크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4월 1일 미군 특수부대와 해병대의 작전으로 구출됐다.

린치 스토리는 미국인의 용광로 같은 '전쟁 애국심' 열기에 던져진 질 좋은 철광석이었다. 국방부와 언론은 린치를 영웅으로 둔갑시켰다. 그녀는 개인 총기를 부여잡고 마지막 한발까지 쏘아댄 것으로 포장됐다. 그러나 린치가 병상에서 일어나면서 진실은 드러났다. 그녀는 차가 엎어져 부상했으며 극도의 공포에 질렸고 어쨌거나 총 한방 쏘지 못했다. 그래도 미국인에게 린치는 린치였다. 지난달 NBC방송이 그녀를 소재로 TV용 영화를 제작해 방영했다. 회고록 '제시카 린치 스토리'는 지난달 미 주간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린치나 알리는 모두 2003년에서 빨리 달아나려고 한다. 린치는 지난달 미국 abc방송 다이앤 소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기억은 떠올리기에 너무 고통스럽다"며 "나는 영웅이 아니다. 떠도는 얘기들은 미 국방부가 의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 abc방송이 최근 전한 바에 따르면 알리는 처음에는 "내 가족을 모두 태워 죽인 전투기 조종사도 똑같은 아픔을 겪어야 한다"며 복수를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는 지금 복수심조차도 잊어가고 있다. 소년의 꿈은 이제 아랍어 통역사가 되는 것이다. 아랍과 서구 간에 다리를 놓고 싶다는 것이다. 전쟁은 진행 중이다. 내년에는 또 어떤 알리와 린치가 나올까.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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