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식당에 쇠고기가 없다/가격자유화이후의 모스크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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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루블화 가치 떨어져 치솟는 물가/식료품 구입난… 경제회복 불투명/김영희 본사 상무
한달 최저임금이 3백50루블,평균봉급이 7백루블인데 질좋은 소시지 1㎏에 5백루블,쇠고기 1㎏에 3백루블인 것이 1월2일부터 실시된 가격자유화뒤 러시아사람들의 짜증나는 생활형편이다. 정초에 모스크바에 와서 8일 있는 동안 호텔식당에서는 아침식사로 달걀만 먹었다 소시지·햄·베이컨은 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루블을 받는 식당에 그런 식품이 들어올 수가 없었다.
지금 세계는 옐친의 대담한 도박인 가격자유화의 성패를 지켜보고 있다. 많은 것이 거기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옐친의 말대로 앞으로 6∼8개월 안에 가격자유화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공산당 잔존세력과 보수세력,그리고 다른 불만세력이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아 옐친정부의 존립을 위협할 소지가 얼마든지 남아있다.
○시장경제 성패기로
옐친의 구상은 이렇다. 정부에 의한 가격통제를 해제하면 물가는 최고 4백50%까지 오르고,그 대신 식료품을 포함한 물자의 공급이 늘어 만성적인 물자부족이 상당히 해소된다. 그렇게 되면 정부에의한 가격보조를 대폭 삭감하고 각종 세금을 올려 재정적자를 줄인다. 루블화의 가치가 회복되어 루블은 국제적인 교환성을 갖게 된다. 그러고는 대부분의 기업을 사유화해 본격적인 시장경제가 궤도에 오른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가격자유화로 물가가 오른다고 해도 옐친정부가 기대하는 만큼의 공급이 늘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물가인상의 폭은 공급을 충분히 늘리기에는 못미치고,연금과 봉급으로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빈곤선 밑으로 끌어내리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구소련을 통틀어 비축된 식료품의 절대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러시아정부도 인정한다. 거기다가 고르바초프정권 마지막 2∼3년에 루블을 마구 찍어낸 결과 루블홍수가 일어나 초인플레의 조건이 잘 갖춰져 있다.
소련연방의 붕괴는 유통구조의 붕괴를 가져와 어느 공화국의 어느 지역에 남아도는 식품이 있어도 제때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다른 지역에 공급할 수가 없다. 공동의 경제개혁에 합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립되는 이해를 얼버무려둔채 출범한 독립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공화국들이 가격자유화를 포함한 시장경제의 성공을 위해 협조할 조건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특히 러시아공화국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우크라이나는 한편으로는 흑해함대의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러시아가 단독으로 가격자유화를 할 경우 우크라이나의 물자가 러시아로 빠져나가고 러시아의 루블이 우크라이나로 쏟아져 들어와 물가폭등을 유발할 것에 대비해 재빨리 쿠퐁을 발행했다. 이 쿠퐁은 일종의 상품권이지만 사실상 최초의 비루블 화폐다.
○우크라와 경제전쟁
러시아에서는 특권층에 속하는 세르게이 이바노프(가명)는 그들만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아늑한 고급식당으로 두번 우리를 초대했다. 그 식당은 루블을 받는 대신 음식값이 비싸다. 그래서 이바노프는 번번히 손가방에 루블을 몇뭉치씩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식사값을 치렀다.
식사중에 우크라이나가 쿠퐁을 발행했다는 속보가 텔리비전뉴스에 나오자 그는 바짝 긴장했다. 첫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제전쟁」을 걱정해서고,둘째는 러시아의 가격자유화로 우크라이나의 물자가 대량 흘러 들어오리라는 은근한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이고,셋째는 우크라이나가 루블사용을 중단할 경우 그 돈이 대부분 러시아로 흘러들어 인플레를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러시아에서 겪는 기이한 체험의 하나는 물건값이나 음식값이 상점에 따라,시간에 따라,그리고 파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다. 부다페스트호텔의 식당에서도 여드렛동안 아침 식사값이 같아본 적이 없다. 또 하나의 충격은 루블로 값을 지불하고,정부 보조가 있는 바로 거기서 저녁시간에는 다섯사람이 샴페인 두병을 마시고,쇼를 보면서 철갑상어알이 포함된 산해진미의 식사를 했는데 식사값은 도합 1천4백루블로 12달러 정도라는 사실이다.
서점에 가서 두툼한 단편집이나 장편소설을 사면 한권에 한국돈으로 몇10원이면 된다. 정부보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이런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가격자유화에 앞서 기업을 민영화하고 정부보조를 폐지했어야 한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말해준다. 자유시장에서 팔리는 비행기값이 어느날은 하루에 몇차례에 걸쳐 13배가 올랐다는 사실도 루블은 가랑잎같이 가치를 잃어가고,그래서 사람들은 쓸모가 있고 없고간에 루블로 살수 있는 것이라면 몇시간씩 줄을 서서 산다.
옐친 정부가 과감하게 추진하겠다는 시장경제이행의 성패는 가격자유화의 성패에 달렸다. 그렇게 보면 가격자유화의 성공여부가 옐친정부의 존립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옐친이 전국을 돌면서 가격자유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국민들에게 6∼8개월만 참아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정치개혁을 서둘러 화를 자초하고 급기야는 소련연방의 붕괴를 재촉했다. 고르바초프가 정치에서 저지른 실수를 옐친이 경제에서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옐친은 경제적인 필요에서 독일에는 볼가유역의 독일계에서 자치공화국을 인정하겠다고 하고,일본에는 북방영토 4개중 2개는 반환할 뜻을 비치고,한국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북한에 특사를 보내서라도 남북관계개선에 기여하겠다는 자세다.
○“반년만 기다려라”
한국에 있어 옐친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최선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의 경제적·정치적 안정과 독립국공동체의 성공에 직접적인 이해를 걸고 있다. 그런데 옐친과 대립하게 된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러시아공화국 부총리의 말대로 러시아는 지금 시장경제가 아니라 엄청난 혼돈속에 빠져들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된다. 지금의 사태가 고르바초프에 이은 옐친의 「종말의 시작」이라면 우리는 「옐친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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