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태극기 유신출발 "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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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72년12월23일 오전10시 서울장충체육관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식이 열렸다. 10월 유신헌법에 따라 구성된 국민회의는 첫모임을 갖고 8대 대통령을 뽑은 선거에 들어간 것이다.
체육관 천장엔 5색 휘장이 드리워졌다. 대의원 2천3백59명과 전국무위원을 포함한 내빈 4백여 명은 실내를 장중하게 메우고 있었다.
단상 맞은편 1층 바닥엔 거대한 태극기가 깃대에 꽂혀 7m 쯤이나 높게 솟아올랐다. 국기에 대한 경례가 끝나고 곧 국민회의 의장인 박정희대통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개회사를 읽어 내려갔다.
『10월 유신은 이 민족의 지상명령에 따라 민족의 안정과 번영, 그리고 통일조국을 위해…』

<깃대 이음새 녹아>
순간 이게 웬일일까. 개회사가 구절 구절을 넘어가고 있을 때 태극기깃대가 서서히 휘어 내려왔다. 개회사가 끝날 무렵엔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유신대통령을 뽑은 가장 상서로운 자리에서 가장 상서롭지 못한 일이 터진 것이다. 첫 걸음마에 나선 유신이 낙상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유신비판론자들은 이를 두고 『유신정권은 출발부터 그렇게 불길했다』고 꼬집는다.
깃대는 왜 부러졌을까. 김창직 전교통부장관은 그때 총무처총무국장으로 행사를 준비했었다. 그는 식장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새파랗게 질렸으며『내 관운도 이걸로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
『당초에는 정면 벽에다 붙이려 했는데 잘 보이게 하려면 바닥에 높게 세우는 게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졌지요. 그래서 하루 전에 부랴부랴 깃대를 만들었어요. 직경이 10cm나 되는 플래스틱 파이프를 서 너 개 붙여서 이었지요.
거기까진 좋았는데 공교롭게도 체육관 난방구멍 옆에 깃대를 세워 놓은 게 잘못이었어요. 그날 날씨가 추워 난방을 세게 틀었고 뜨끈뜨끈한 바람이 플래스틱 파이프 이음새를 서서히 녹이기 시작한 거죠.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런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감당할 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사표를 썼죠. 다행히 박대통령이 그냥 덮어 줘 무사히 지나갔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김정렴 비서실장·박종규 경호실장·서일교 총무처장관이 박대통령한테 서로 자기 잘못이라고 했대요. 박대통령은 웃으면서 「취임식 준비나 잘하라」고 했다는 거죠.』

<혈서까지 쓰기도>
유신은 이렇게 얘깃거리를 낳으면서 7년 생을 시작했다. 그리고 79년10월26 정말 깃대처럼 『꽈당』하고 넘어져 버렸다. 탄생·성장·쇠락·사망의 주요과정은 이재 세월덕분에 양지에 드러나 역사가 되어있다.
그러나 아직도 몇몇 대목에선 기분이 찜찜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은 흔적이 있다. 첫째, 유신에 대한 야당태도가 수상쩍었고 둘째, 북한 김일성도 똑같은 시기에 박대통령처럼 「총통급」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박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버리자』『버리지 말자』라는 논쟁의 앙금이 있는 것이다.
먼저 72년10월 비상계엄직후 정보부와 야당을 연결했던 일부 추잡한 거래선을 따라가 보자. 조윤형·최형우·이세규·강량호·김한수 등 동료의원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 통닭구이·물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도 다른 구석에선 정치자금을 챙기고 「혈서충성」을 맹세한 의원들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정보부에 근무했던 Z씨는 『야당도 다 야당이 아니었다』며 이렇게 폭로했다.
『계엄선포 후 야당을 상대로 사실상 회유·설득·협박작업이 시작됐어요. 내가 알기론 보안사에 끌려갔던 의원들 외에 다른 사람 중에서 유신에 대해 반대한 이는 별로 없어요. 사실 반대하고싶어도 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지방에 있던 어떤 의원은 유신을 지지한다는 혈서를 써서 정보부에 보내오기도 했어요. 하얀 종이에 피로「나라안팎 사정을 보면 유신이 불가피하고…」라는 내용이었지요. 또 이름을 대면 알만한 몇몇 의원은 지방방송국에 나가 유신에 찬성하는 발언도 했고요.』 보안사 쪽 증언자 모씨는 이런 기억을 털어놓았다.
『어떤 의원 한사람은 「정치자금이 좀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어요. 유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유신 전에도 야당의원들이 정보기관장 사무실에 들를 때면 휘파람을 불 정도로 표정이 좋더라고요. 올 때마다 뭔가 듬직한걸 받아갔거든요. 그래서 박대통령은 평소에 측근들한테 이런 말을 하곤 했어요. 「그 야당 한다는 친구들 말이야. 정말 기분 나빠. 낮에는 야당하고 밤에는 여당하고…. 국회에서 떠들 땐 언제고 돌아서면 정치자금이나 챙기고…」라고요. 박대통령이 야당의원한테 가혹했던 데는 이런 심리가 있었을 거예요.』

<"거래 아닌 대화">
구신민당 중진출신 K씨는 이런 정보부·보안사얘기에 대해 『의리도 없는 무책임한 증언』이라고 맞받아 친다.
『야당행동이 전부 떳떳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 정치풍토가 어땠습니까. 공화당은 얼굴마담이고 정보부 같은데서 다 했잖아요.
정치란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되는 거예요. 그래야 명분도 찾고 타협도 되지요. 정보기관사람들 주장이 얼마나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거래」가 아니라 「대화」라는 겁니다. 봉투가 오갔다 하지만 인사치레 정도였겠지 몇 푼 되겠습니까.』 야당이라고 해서 꼭 유신 반대편에 서야한다는 명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어쨌건 유신이 민주정치체제를 짓누르고 거기에다가 동료의원이 고문당한 상황이라면 야당이 옷매무새를 제대로 추스려야 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비판자그룹이 집어내는 또 다른 의혹은 『남북이 짜 맞춘 것처럼 통치체제가 변했다』는 점이다. 김재순 전국회의장은 여당 중진출신이면서도 유신에 대해선 차가운 비판자다. 그는『10월 유신과 동시에 북도 1인 절대 지배체제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위해 이 부분은 해명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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