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 서비스업만활황/기업대출금까지 마구전용(돈선거 안된다: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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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왜곡되는 돈의 흐름/생산인력 30만명 빼앗아/먹고노는 풍조로 근로의욕 저하/탈세늘어 지하경제 팽창
시중은행의 한임원은 요즘 골치아픈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내년 국회의원선거 입후보 예상자로부터 자기친척이 하는 중소기업 앞으로 대출을 좀 해주라는 압력성 부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5억원,안되면 2억∼3억원 이라도 해주라는 요청인데 담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20억원대의 부동산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동남아지역으로 수출확장을 위한 시설투자에 쓸 돈이라고 명분이야 그럴듯하게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선거자금 마련을 위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은행이 신규대출을 일으키고 그것이 선거자금으로 쓰일때 선거인플레 현상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내년도 네차례의 선거에는 적어도 10조원 안팎의 돈이 동원된다고 하나 이 돈이 모두 통화량 증가를 의미하진 않는다.
선거자금은 은행을 통한 신규대출에 의해서만 통화량 증가로 이어질뿐 후보자신이 은행이나 단자회사 등 금융기관에 맡겨둔 예금을 찾아 선거비용으로 쓰는 경우는 기존의 통화가 모양새를 달리하는 것이지 새로운 통화공급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을 팔아 마련한 돈이나 기업인 등으로부터 기부받은 정치자금도 그 돈이 신규대출금이 아닌 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선거가 있었던 달의 총통화 증가율은 평소때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동서증권이 85년 2월 총선부터 지난 6월 광역의회 선거까지 5차례 선거의 총통화 증가율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선거가 낀달의 평균 총통화 증가율은 17.5%로 선거 두달전의 16.7%나 한달전의 17.2% 보다 상당히 높았으며 선거가 끝나면 선거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분석은 어떤형태로든 은행대출금이 선거에 쓰여지고 있거나 정부가 선거를 의식해 재정집행을 늘렸다는 반증이 된다. 다시말해 선거는 부분적이나마 통화팽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들뜬 사회분위기와 어울려 물가불안을 낳는다는 지적이다.
후보가 자신의 은행예금을 인출해 선거자금으로 쓰는 경우는 「통화증가」는 아니더라도 경제에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은행이 예금으로 조성된 자금을 수출업체에 지원하면 무역적자 개선에 도움이 되겠지만 돈주인이 그 돈을 찾아 선거운동원이나 유권자들에게 한푼 두푼 나누어 줬을 땐 먹고마시는데 쓰이는게 다반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소비성이 강한 선거자금은 같은 양이라도 유통속도가 빨라 피부로 느끼는 돈의 양은 많아져 흥청망청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선거자금은 이와 함께 지하경제 규모를 부풀리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있다. 기업하는 사람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 회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뻔한 현실이며 그만큼 지하경제를 키워놓는다고 곽상경 고대교수(경제학)는 지적한다.
금융실명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선 이같은 부작용을 막을 수단도 별로없다.
선거의 부정적인 면중에는 일하려는 의욕을 흔들어 놓고 적잖은 인력을 생산현장으로부터 빼앗아 간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내년 내내 이어질 선거분위기는 최근 시작된 「일 더하기운동」을 무위로 돌릴 소지가 많으며,경제계에서는 내년 선거에 빠져나갈 생산인력이 최소한 3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돈선거는 또 수출 등 필요한 부문의 성장을 막고 음·식료를 비롯한 서비스 분야와 종이 등 특정산업의 이상활황을 불러 옴으로써 산업간 불균형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
최광 외국어대 교수는 제조업체에 나간 돈이 선거자금으로 전용되고 이 돈이 유흥업소나 관광업계로 흘러가거나 한정된 금융자원을 서비스업종이 많이 차지할 때의 폐해가 걱정된다고 말한다.
이같은 제반문제는 돈을 많이 뿌리면 당선이 되고,당선만 된다면 돈을 아무리 써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당선후엔 그 이상을 충분히 「뽑아낼」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울대 법대 박세일 교수는 경제에 대한 정부규제가 많은 사회구조가 정치인과 경제인을 결탁시키는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수출입·건설·조세·금융 등 모든 경제분야에는 정부의 인허가 또는 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한 일이 숱하게 있으며 이같은 정부규제가 정치자금의 공급원이 되는 기업인을 양산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선거자금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선거철이 되면 기업인들이 먼저 승산있는 정당의 간부나 당선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 접근하는 경우도 많은 현실이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심상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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