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눈멀어 어린생명 짓밟아/유괴사건(추적 ’9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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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개구리소년들 9개월째 감감/부모들은 생업놓고 전국수색/초동수사 잘못해 형호군 범인 놓쳐
1월29일 유괴돼 40여일만에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이형호군(9·압구정국교 3)사건은 「돈이면 어린 생명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처절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7천만원을 요구하며 46차례나 협박전화를 하던 유괴범은 경찰의 수사력을 조롱하듯 공개수사가 시작된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윤곽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가족들은 악몽에서 헤어나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경찰은 지금까지 범인이 남긴 유일한 단서인 간단한 메모쪽지와 전화음성을 활용하며 유괴범검거에 5천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힘겨운 추적을 계속하고 있다.
범인이 출몰했던 강남일대·김포공항·광명시등을 중심으로 여관숙박부·경찰서 교통사고기록·동사무소 전출입기록 등에 나타난 1만여명의 필적을 감정했으며 범인의 음성이 담긴 2분짜리 비디오테이프를 제작,각 사회단체에 배포했다.
또 유선방송협회와 교통방송을 통해 정기적으로 범인음성을 내보내고 있다.
경찰은 과학수사연구소와 KBS성우들에게 음성분석을 의뢰,범인이 서울·경기출신의 고졸학력이상 20∼30대 남자라는 것 정도만 밝혔냈을 뿐이다.
경찰이 초동수사단계에서 3차례나 검거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범인은 더욱 깊숙이 잠적,수사는 벽에 부닥쳐 있다.
형호군 가족들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잊기위해 6월 집을 압구정동에서 도봉동으로 옮겼다.
아버지 이우실씨(35)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한달전부터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중소가죽가공업체인 서울 신당동 「성광피혁」을 운영하며 『내아들은 죽었지만 다른집의 아이들을 위해 범인을 꼭잡아야 한다』고 경찰과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한편 불우한 아동들을 위한 사회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씨는 『음지에서 고통받고있는 애들을 위해 조금만 힘을 보탤 생각』이라며 『생활이 정리되는 대로 고아원지원 사업등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형호군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 수원 이득화군(8·파장국교1)사건이 발생했다.
이군은 10월29일 집근처 공터에서 놀다 유괴돼 13일만인 11월11일 서호천에서 목졸린 시체로 발견됐다.
시민제보로 검거된 유괴범 문승도(23·상업)범행동기가 「노름빚 변제」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문은 『득화에게 저지른 엄청난 잘못을 씻기위해 죽을 때까지 참회하겠다』며 삶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득화군 부모들은 또 득화의 형인 진화군(9·파장국교 3)도 유괴될까 두려워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서만 놀게한다.
잇따른 유괴살인과 함께 대구시 이곡동 성서국교생 5명의 실종사건도 어른들에게 「어린이 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3월26일 인근 와룡산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집을 나가 실종된지 9개월이 됐지만 개구리가 동면에 든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있다.
실종발생이후 전국에서 동원된 경찰은 줄잡아 20만명으로 단일실종사건으로는 최대의 인원을 기록하고 있다.
경찰은 지금까지 주변야산을 1백91차례 수색했고 인근 4개 저수지의 물을 빼내 바닥을 일일이 뒤지기도 했으며 전국 주요도시의 앵벌이·구두닦이들도 수사했다.
이와 함께 「개구리소년찾기」에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각종 캠페인이 벌어져 실종어린이들의 사진을 넣은 88담배 1천만갑과 상품광고지 1천3백여만장이 발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수사는 여전히 미궁속을 맴돌고있어 실종어린이의 부모들은 거의 생업을 포기한채 전국을 돌며 아이들을 찾고있다.
실종어린이의 아버지들은 현재 『개구리 소년』이란 노래를 부른 가수 박성미양(27)과 함께 인천시 뺑소니 추방시민회가 기증한 방송차량으로 전국을 돌며 전단을 배포중이다.
경찰은 외딴 섬이나 불량복지시설·특수종교단체 등을 상대로 전국적인 공조수사를 계속할 예정이나 전망은 그리 밝지않다.<이규연·김선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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