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밀알될지 두고 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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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21일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내 벤처기업협회를 방문해 벤처기업 대표들과 얘기하고 있다.[조용철 기자]

노무현 대통령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탈당을 둘러싼 충돌은 21일 수위 조절에 들어갔다. 불과 하루 만이다. 청와대는 비판을 이어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 대통령 발언의 취지를 설명하는 형식에 그쳤다.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도 않았다. 고건 전 총리의 낙마로 이어진 '노(盧)-고(高)' 충돌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고 전 총리에 대한 직접 비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와대와 손 전 지사 간의 긴장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날도 양측은 "손 전 지사의 탈당 의도가 결국 드러날 것"(청와대), "지켜보고 판단해달라"(손 전 지사)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긴 싸움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 숨고르기 들어간 청와대=청와대는 이날 홈페이지에 정무팀의 이름으로 '대통령이 손학규 전 지사를 오해했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청와대 정무팀은 이 글에서 "(만약)손 전 지사가 대선에서 개인적 이해 관계 없이 탈당한 것이라면 용기 있는 결단이고, 대통령의 비판은 손 전 지사를 오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손 전 지사의 탈당 자체를 문제삼는 게 아니다. 그 행위가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가시를 빼놓지 않았다. "대통령이 손 전 지사의 뜻을 오해한 것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라며 "그가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 명분을 버리고 탈당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정치 질서 창출에 하나의 밀알이 되고자 탈당한 것인지는 곧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인제 의원과 김민석 전 의원을 거론하며 "대의 명분 없이 행동하여 실패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원칙 없고 명분 없는 탈당은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거듭 설명한 것"이라며 "오늘 얘기의 방점은 '오해'가 아닌 '몰락'"이라고 전했다.

◆ "진정성 갖고 봐 달라"=손 전 지사도 이날은 격하게 대응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 말의 진정성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할지를 지켜보면서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나는 미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겠다는 충정을 갖고 창업의 길에 나섰다"며 "대통령도 진정성을 갖고 내 진정성을 봐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손 전 지사는 '뼈 있는' 말도 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책상 앞에 앉아 e-메일 보내고 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일련의 흐름 속에서 정치권은 여전히 노 대통령의 의도에 매달리고 있다. 과연 무슨 이유로 손 전 지사를 비판했느냐다. 노 대통령이 고도의 정치적 의도를 갖고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이날 한양대 특강에서 "손 전 지사는 결점이 없는 후보이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 한나라당에 있을 때보다는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의 공개 비판과 관련, "표면상으로는 노 대통령이 비난하지만 이는 바로 정치 고단수의 띄워주기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를 부인한다. 노 대통령도 직접 이날 아침 참모회의에서 "전략 없이 가는 게 참여정부의 전략이다. 유.불리 따지지 말고 원칙대로 가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얘기도 있다. 노 대통령이 손 전 지사에 대해 개인적 불신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손 전 지사가 지난해 10월 노 대통령을 향해 "노 대통령은 거의 송장, 시체가 다 돼 있는데 비판해서 뭐하느냐"고 한 발언을 계기로 꼽는 범여권 인사들이 많다. 범여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당시 인간적인 배신감, 불쾌감을 느꼈다"며 "노 대통령은 그런 기억이 오래가는 스타일"이라고 전했다.

고정애.채병건 기자<ockham@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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