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3)서울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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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금까지 7회에 걸쳐 세 천재와 그에 관련된 언론계 이야기를 써왔고, 그 앞에서는 6·25사변때 정부가 부산에서 환도한 경위를 써 일단 딱딱한 정치 이야기를 끝맺었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현대사는 파란에 찬 격동의 연속이었다.
해방되면서부터 좌우의 싸움과 분단, 6·25사변, 4·19와 5·16, 이어서 유신체제, 5·17과 광주사태등 엄청난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변동을 겪어왔다.
해방된지 40여년동안 눈코 뜰새없이 겪어온 이런 모든 변동의 밑바닥을 흐르는 숨은 이야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물론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좀더 시일을 두고 뜸을 들여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6·25사변 때까지의 이야기로 끝을 맺기로 한다.
이제 나는 해방후부터 6·25사변때까지 몸소 겪어온 여러가지체험담을 13∼14회에 걸쳐 이야기할 작정이다.
이것이 그동안의 사회변동의 한방증이 되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한토막이 될는지 모른다.
그동안에도 사이사이 해방후의 내 이야기를 해왔지만,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경험담을 풀어보기로 한다.
8·15해방을 맞이하자 그날로 매일신보사는 해산되고 평사원 중심의 자치위원회가 발족되어 신문을 계속 발행했다.
자치위원회 위원장에는 문화부에서 내 아래 있던 윤희정이 당선되었다.
그는 국민학교 그림선생이었는데 신문 삽화를 그리기 위해서 내가 문학부에 입사시킨 사람이었다.
온후하고 착실한 사람이었지만 자치위원장에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폐결핵으로 별세했다.
나는 윤희정위원장과 의논한후 신문지상에 「동포여러분께 고합니다」라는 제목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나는 신문사를 떠났다.
새학기부터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과 약학대학의 영어강사가 되었고 동참들이 간부로 있는 중석광산회사의 영문사무를 돌보아주었다.
그때 매일신보를 뗘난 정인익은 자유신문사를 창립해 신익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이 되었다. 거기서 나를 주필로 초청했고 그 신문사에 있는 많은 친구들의 권고도 있고해서 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취임하기 전날 돈을 대는 자본주의 앞잡이이자 나의 중학동창인 그 신문사 전무의 방해로 취임이 취소되었다.
그 이듬해 이상협이 경향신문 사장에 취임하자 나를 주필, 이길상을 편집국장에 임명하였다.
그때 조모란 사람이 있었는데 일제때 서울 종로경찰서의 경방단장으로 있으면서 갖은 못된 짓을 다해온 자다. 이 사람이 천주교신자라는 점을 믿고, 또 이상협과 안면이 있는 것을 기화로 경향신문의 간부로 앉히려는 운동이 있었다.
이때문에 신문 경영자측이 크게 노해 문제가 커졌으므로 이상협은 자진해서 물러났고 이길상도 그만두었다.
나만은 새로 취임한 이복영사장과 편집국장 이완성신부의 옹호로 얼마동안 그대로 주필로 있다가 두 신부와 함께 경향신문을 물러났다.
내가 주필로 있을 당시인 1947년7월에 여운형이 대낮에 명륜동 네거리에서 암살되었다.
아직 신문사에서도 모르고 있는데 별안간 미군 정보계통의 중령이 주필실로 나를 찾아와서 이소식을 전하고 여씨에 대한 것과 당시 좌우익 관계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묻고 갔다.
나는 경찰에서도 채 알지 못하고 신문사에서도 모르는 일을 미리 알고 정보를 수집하러온 미군정보망의 신속함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해 1947년12월2일에는 한민당 정치부장인 장덕수도 대낮에 안암동자택에서 현직 경찰관에 의해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살벌한 세상이었다.
장덕수로 말하면 앞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전후해 민족주의진영의 대표로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누가 시킨 깃인지, 경관이 찾아왔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안에서 현관으로 나가자 불문곡직하고 권총을 쏘아댄 것이었다. 정말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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