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업거부 해고」 정당화 하는 일본/이석구 동경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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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 사람들을 보면 「일하기 위해 산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1인당 GNP(국민총생산)가 2만달러를 넘는다 하지만 중산층이상의 생활만을 볼때 우리보다 그리 나을 것도 없다. 회사만 부자일뿐,국민 각자의 생활은 그저 그렇다. 국가경제력에 비해 수입은 결코 많지 않다.
올해 대졸신입사원의 월평균임금이 17만엔(한화 약90만원)인데,물가나 나라의 살림규모를 감안해 보면 우리보다 높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본인들의 집크기만을 갖고 본다면 우리가 더 잘산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도 일반서민들은 큰 불평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이같은 일본인의 의식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뜻있는(?) 사람들이 개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행한 여론조사에서 『높은 보수보다 여가를 원한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열심히 일하기보다 여가를 더 원하는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고 걱정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8일 이같은 일본인들의 의식변화에 찬물을 끼얹는 판결을 내렸다. 잔업지시를 거부한 근로자를 회사가 해고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타치(일립) 제작소에서 잔업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근로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1심판결은 원고승소판결을 내렸으나 2심과 최고재판소는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최고재판소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노사간 잔업협정이 맺어져 있고,그 협정이 합리적이면 근로자는 잔업의무를 진다』고 회사측의 해고조치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같은 판결이 나오자 학계·노동계에선 즉시 이를 비판하는 소리가 나왔다. 근로시간 단축은 세계적 추세인데 이에 역행하는 판결이라는 것이다.
또 잔업이 일상화 돼 있다는 이유로 「인권 후진국」이라는 불명예를 쓰고 있는 일본을 최고재판소가 추인해줬다는 비판이 언론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소리일뿐 더이상 사회적으로 큰 목소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본사회 전체의 컨센서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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