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부가 뜬 탁본 행묘년기사|「해」자는 변조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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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집안박물관의 원석 탁본=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1차 조사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둔 조사단 일행은 밤늦도록 능비를 비롯하여 벽화·고분 등 고구려유적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지질학자인 김희영 박사와의 토론에서 현무암질의 화산암으로 된 능비의 재질상 비석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광학적 방법을 이용한 사진 분석을 거친다면 능비 건립 당시에 새겨 넣은 문자의 획과 후대에 손상되거나 첨가된 흔적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 비문연구는 이제부터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매우 정교한 원탁>
이튿날 아침 능비의 원석탁본을 조사하기 위해 먼저 집안박물관으로 향했다. 집안 박물관은 단층 건물로 고구려 고향의 박물관으로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입구의 사무실에는 고구려 벽화의 모사품들이 걸려 있고 안쪽의 진열실은 두칸으로 되어 있는데 바깥쪽의 전시실에는 토기와 청동·철제류가 진열되어 있으나 몇 점의 고구려 농기구와 유약 바른 화덕모양의 도기 등의 눈을 끌었을 뿐 4백년 고구려 왕도의 유물이라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박물관 측의 설명으로는 장소가 협소하여 유물 모두를 전시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며 앞으로 보다 규모가 큰 박물관을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안쪽에는 1928년에 제작되었다는 능비의 탁본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도안 일체의 촬영이 금지되었던 터라 국내 학계에는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았으나 능비 연구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탁본으로 일견 보아도 매우 정교한 원탁으로 보여졌다.
능비의 탁본종류와 문제점=능비 탁본은 쌍구가묵본·원석탁본·석회가공탁본의 세종류가 있는데 비석의 크기와 현지여건관계로 탁본을 뜨기가 어렵기 때문에 원석 탁본은 매우 희귀하여 한·중·일 삼국을 모두 합쳐도 몇 점되지 않는 형편이다. 원석탁본은 석회 가공 이전의 탁본과 석회가 탈락하기 시작한 이후의 탁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집안 박물관의 탁본은 후자의 경우이며, 아마도 당시의 집안현지사였던 유천성이 보호각을 지을 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원래 비가 1880년경 황초중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오랜 세월의 이끼로 인한 비면상태의 불량으로 간단한 수탁이 이루어졌을 뿐 정교한 전면탁본은 만들어지지 못했으며 초기에는 가볍게 경척을 하여 문자를 임의로 판정한 뒤 문자 테두리를 칠한 쌍구가묵본이 일반적이었다. 일본 삼모본부의 밀정이었던 주구경신이 일본으로 반입했던 문제의 탁본도 바로 현지의 탁공을 매수하여 만든 이와 같은 쌍구본이다. 그 과정에서 원비의 일부가 손상되었던 것이다. 이후 배경의 탁공들에 의해 원석탁본이 만들어 졌으나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오늘날 남아 있는 탁본의 대부분은 탁공의 고가매매와 일본 삼모본부의 고의석 목적에 의해 비석에 석회를 칠하여 비면을 고르게 한 뒤 탁본을 뜬 이른바 석회가공탁본으로 이 경우 문자의 오독과 교란이 불가피하여 많은 논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집안 박물관의 탁본은 석회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직후의 탁본으로 여전히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연구 가치가 충분한 탁본으로 여겨진다.

<석회칠 해떠 오독>
주목되는 것은 집안박물관 탁본에서도 문제의 신묘년 기사중의 「내도해파」에서 「해」자의 경우 초기의 원석 탁본인 모만의 부사년도서관탁본, 일본의 수곡탁본, 한국의 임창정선생 소장탁본과 마찬가지로 「해」자의 좌변인 「수」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광개토왕릉비문의 구성과 쟁점=쌍구본이나 석회 가공 탁본에는 분명한 「해」자가 원석 탁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능비는 사면비로 비면의 상단을 제외하면 4면 가득히 44행에 걸쳐 10∼15㎝ 크기의 문자 1천7백75자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은 대체로 3부로 구성되어있다. 고구려 건국신화가 실려있는 제1부와 수묘규정을 기록한 제3부도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나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제2부의 정복기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논쟁이 많았던 부분이 영락5년과 6년사이에 있는 이른바 신묘년기사다.
즉, 쌍구본이나 석회가공탁본등 탁본상 문제가 있는 자료에 의해 신묘년 기사는 「백잔신나구하속민유내조공, 이왜이신묘년내도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391년)에 왜가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및신라를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고 판독 해석되어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기사가 고구려의 훈속비에 실려있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모순으로 신묘년 기사가 과장된 것이라든지 「도해파백잔」의 주체가 고구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문의 구조상 주문의 주어는 모두 왕, 태왕 등의 표현으로 되어 있으며 주문의 첫구절에서 주어가 생략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구려를 나타내는 주어 일부가변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문의 내용상 신묘년 기사에서 「파백잔」의 주어가 될 수 있는 부분은 「해」자 뿐인데 원석 탁본에는 「해」자의 경우 모두 「수」변이 없는 형태다. 이는 우연의 일치인가.
현지조사의 성과의 전망=이점을 원비에서 보다 분명히 관찰하기 위해 관람객이 거의 없는 오후 늦게 능비에 대한 재조사에 나섰다. 원비에서도 이 부분의 교란된 흔적이 역력하였으며 육안으로는 해자의 자획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종선에 걸쳐있어>
퇴근시간에 좇기는 안내원 아가씨의 재촉으로 아쉬움을 남긴 채 발걸음을 돌렸으나 이번의 조사는 일반적 관례에 비춘다면 파격적인 것으로 이 모두 길림문물고고연구소의 방기동소장과 집안박물관의 경철화관장의 전폭적인 협조에 의한 것으로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두차례의 조사에서 얻은 성과를 토대로 현재 전희영박사와 함께 「스테레오스코프」라는 광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정밀하게 이중 촬영한 비면의 사진을 분석 중에 있는데, 일차적인 결론을 밝힌다면 원비면의 경우 문제의 「해」자는 교란흔적이 역력하며,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해자의 「수」변이 비문을 가지런하게 새기기 위해 그은 종선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의 각도가 원래의 글자에 비하면 현저하게 엷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후대에 가획된 것이 틀림없어 왜 원석탁본에는 없던 「해」자의 「수」변이 쌍구본이나 석희가공탁본에는 분명히 나타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는 물론 단순한 비면의 마모나 탁본상의부주의에 의한 것은 아니며 고구려가 주어임을 나타내는 「왕」과 같은 간단한 자획의 문자를 주구경신을 비롯한 일본 삼모본부가 가획 변조함으로써 비문의 주어를 왜로 바꾸고자 하였던 음모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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