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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용어를 또 바꾼다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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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에 반해 우리나라 수학 용어의 경우, '소수(小數)'와 발음이 같은 '소수(素數)'는 오랫동안 '솟수'로 표기해 왔다. 나아가 '초점'은 '촛점', '도수 분포'는 '돗수 분포', 일반 단어인 '내과'도 '냇과'로 표기하다 1988년부터 다시 '소수' '초점' '도수' '내과'로 되돌아갔다.

맞춤법이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렇게 왔다 갔다 하던 차에 최근에는 교육인적자원부와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을 개정하면서 '사이시옷'에 관한 표기 기준을 통일하는 개정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기준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무런 불편 없이 쓰여 온 상당수 수학.과학 용어에 '사이시옷'을 넣어 표기해야 한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자와 한자 사이에는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다. 즉 한자로만 결합돼 있는 '근사치'(近似値)는 사이시옷 없이 표기한다.

둘째, 한자와 우리말 사이에는 '사이시옷'을 넣어 표기한다. '근사값'(近似값)은 한자와 우리말이 결합돼 있으므로 '근삿값'으로 표기한다.

민족의 자랑인 말과 글을 지켜나가겠다는 관계 당국의 노력은 환영할 일이나 '함수'와 '함숫값', '초기'와 '초깃값'처럼 똑같은 용어의 표기가 일관성을 잃는다면 객관적 개념 유지가 생명인 수학 용어 표기에 커다란 혼란이 예상된다. 나아가 '대푯값, 극솟값, 최댓값' 등을 보면 글자 모양도 어색하고, '꼭지각, 단위길이'는 그대로 써야 할지 '꼭짓각, 단윗길이'로 써야 할지 아리송하다.

획일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해 걸핏하면 맞춤법을 손댈 일이 아니다. 특히 학술용어의 경우 별다른 혼란이 없는 한 관용적인 표기를 존중해 사이시옷을 쓰지 않는 것이 철자 경제상으로도 합리적이다. 200년은 고사하고 20년이 채 안 된 맞춤법 표기안을 또 바꾼다면 교과서를 비롯한 각종 사전 표기를 고쳐야 하는 경제적 부담 또한 결코 적지 않다.

관련 학회와 아무런 협의 없이 구시대적 행정 관행인 협조 공문 달랑 한 장으로 중대한 편수.학술용어를 바꾸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대한수학회.한국물리학회.대한화학회 등 주요 기초과학 학회에는 국어를 사랑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용어위원회가 있고,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도 한글 용어 사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따라서 국립국어원은 반드시 전문학자들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해 신중하고도 합리적으로 학술용어 표기를 결정해야 한다. 북한의 과학 수준은 고립돼 상당히 낮은 수준이지만 학술용어 정비 사업에는 본받을 점이 적지 않다. 북한에선 어려운 한자 용어인 '이산'(離散)은 띄엄띄엄이라는 뜻에서 '띄엄'으로, '수식에서'를 나타내는 한자 용어 멱(冪)은 위치를 기준으로 '어깨수', 포물선은 (돌)'팔매선', '소수'(素數)는 '씨수'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정비가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학술용어 정비에 고심을 거듭한 흔적이 역력하다.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김도한 대한수학회장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