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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칼럼

패티김과 아베 마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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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그녀의 노래는 클래시컬한 스탠더드 팝의 장르에 속한다.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서구적이지만 동양적인 한(恨)도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중앙여고 시절 6개월 만에 판소리 심청가를 완창했고, 국악콩쿠르에서 1위에 입선했던 이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패티김은 1938년생, 우리 나이로 70세다. 현역 최고령 가수다. 59년 3월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해 48년간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폭발적이면서도 격조 있는 창법, 흐트러짐 없고 아름다운 외모,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잔인한 세월마저 굴복시켰다.

가수들이 기껏해야 한두 개의 반짝 히트곡을 남기고 속절없이 사라지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척박한 현실에서 반세기 가까이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미국 스탠더드 팝의 제왕 토니 베넷이 지난해 80세를 맞아 듀엣 앨범을 냈지만 그녀의 빛을 가리진 못한다.

패티김의 전설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더한다. 적어도 가수생활 50년을 맞는 내후년까지는 라이브 무대를 통해 전국의 모든 팬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다는 게 그녀의 목표다.

그런 그녀가 가수들이 상업화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가수는 첫째도 노래, 둘째도 노래, 셋째도 노래를 잘해야 합니다. 잘생긴 사람도, 못생긴 사람도, 키가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노래가 제일 중요합니다." 3일 공연 도중에도 한마디 했다.

지금 국내 대중음악의 현실은 참담하다. 인터넷을 통한 무차별적 다운로드로 대중음악인들의 저작권은 보호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음반 판매로는 안정된 수입을 확보할 수 없다. 가수로 이름을 얻더라도 어쩔 수 없이 영화나 토크쇼, 광고 출연에 목을 맨다. 투자비를 건져야 하는 기획사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니 가창력의 중요성은 무시되고 끝내는 립싱크 가수가 넘쳐나게 된 것이다.

최근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립싱크 가수를 위해 무대 뒤에 숨어서 대신 노래하는 무명가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노래는 영화 밖에서도 히트한 '아베 마리아'였다. 대중음악계의 치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설정이었다.

패티김의 현실비판은 신랄하지만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기 절정기에 밤무대에서 거액을 제시했지만 뿌리쳤다. 재벌 자제들의 유혹도 거절했다. 그런가운데 그녀는 78년 한국 대중가수로는 처음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고, 85년에는 서울시향과 팝 콘서트를 했다. 89년에는 미국 카네기 콘서트홀에서 공연했다.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철학이다. 데이트할 때도 노래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청중과 만나는 무대는 '신성한 장소'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신었던 흙 묻은 신발은 다시 신지 않는다. 이번 공연 도중에도 "평생 노래를 불렀지만 너무 긴장돼서 입술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감정과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예술은 참된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는 괴테의 명언이 떠오른다.

지금 대중은 이름뿐인 껍데기 가수의 범람과 그들의 엉터리 노래에 진절머리 치고 있다. 노래에 죽고 사는 가수의 혼이 실린 진짜 노래가 밤하늘의 별처럼 세상을 수놓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타락한 현실에 맞선 진짜 가수 패티김의 외로운 도전은 처절하지만 아름답다.

이하경 문화스포츠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