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일 하러 갈 뿐 정상회담 5월 이후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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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전 총리 등 열린우리당 방북 대표단이 7일 오후 평양 공항에 도착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정의용 의원, 이 전 총리, 조영택 전 국무조정실장, 이화영 의원. 일행 뒤편에 중국 선양에서 타고온 고려항공 소속 여객기가 보인다. [조선중앙TV 촬영]

7일 오전 11시30분.

인천공항에서 선양(瀋陽)을 향해 출발하는 대한항공 KE831 편에 이해찬 전 총리가 탑승했다. 이어 동승객인 열린우리당 정의용.이화영 의원과 조영택 전 국무조정실장이 들어섰다.

선양엔 56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선지 예정 시간보다 10분 늦게 이륙했다. 이 전 총리의 표정은 밝았다. 기자를 보자 "오랜만인데 살이 좀 찐 것 아니냐"고 인사말을 건넸다.

다음은 기내 일문일답. (※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남북 정상회담을 만들러 가나.

"(웃으며) 언론의 추측일 뿐이다."

-특사니 밀사니 하는 얘기가 많은데.

"나는 내 일을 하러 갈 뿐이다."

-평양에 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이번 방문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가는가.

"남북 경협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지난해 말 금강산, 올 2월 개성공단에 다녀왔다. 느낀 점이 많다. 북한 당국자들을 만나 이런 문제를 얘기하고 싶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최근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안에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이 80~90%"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고 했었다.

-DJ와 6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나.

"한반도 정세에 대해 두루 얘기했다. '북.미 관계가 잘 풀려야 한다. 북한을 잘 보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80~90%' 발언은 그 분의 기대와 희망을 반영하는 것 같다."

-남북, 북.미 관계가 잘 풀리면 언제쯤 정상회담이 가능할까.

"(웃으며) 유도 질문하지 마라. 북핵 문제 초기 조치 이행이 끝나는 것(4월 14일)을 확인하고, 북.미 관계가 돌아가는 것도 봐야 하지 않나. 일러도 5월 말을 넘어가야 가능한 것 아니냐."

-방북 뒤 베이징(北京)에서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담당 부총리를 만나 정상회담 후보지로 다롄(大連)이나 칭다오(靑島) 같은 중국 도시들을 타진하려는 것 아니냐.

"앞서가지 마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이 전 총리는 민감한 질문에는 우회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반면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방북이 아니라고 부인했던 것과 달리 남북 경협 추진 등에는 대담한 구상과 의욕을 펼쳐 보였다. 자신이 만날 북측 인사들의 최근 동향도 파악하고 있음을 은연중 과시했다.

-평양에선 누구를 만날 예정인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박지원 대북 특사는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상대로 협상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영대 민화협 회장, 최승철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만날 것이다."

-남북 협력 사업을 해 왔던 이종혁 아태 부위원장은 안 만나나.

"지금은 이쪽 분야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최 부위원장을 주로 만날 것 같다."

-최 부위원장과는 만난 적이 있나.

"2000년 정상회담 때 평양에 갔더니 아태평화위 서기였다. 그때 처음 만났고 지난해 광주에서 6.15 축전 행사를 할 때 만찬을 함께한 것까지 세 번 봤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50세 전후인데 남북 교류 분야를 맡고 있다. 합리적인 성격이고 남북 대화 일꾼 중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는 것 같다. 출세가 빠른 신진 세대다. 김 위원장의 신임이 두텁다는 얘기를 들었다."

-무슨 얘기를 나눌 것인가.

"남북 경협 사업을 주로 얘기할 것이다. 북한의 자원.노동력을 활용할 사업들이 많다. 과거에 최 위원장의 상급자였던 임동옥 통일전선부장,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두 사람 모두 사망)도 만나 봤다. 그래도 내가 북한을 좀 알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 아닌가."

선양 국제공항에 내려선 이 전 총리의 표정은 밝았다. 이 전 총리 일행은 공항에서 곧바로 고려항공 편으로 갈아타기 위해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대로 이번 방북은 대통령 특사 자격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을 겨냥한 행보를 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이 전 총리와의 기내 인터뷰 시간은 20여 분. 남북, 북.미 관계에선 특유의 논리 정연함이 돋보였다. 반면 '정상회담 특사설' '김정일 면담설'에 대해선 부인했다. 그래도 여운은 남겼다. 5선(選)의 관록과 여권의 기획.정책통으로 장수하면서 '꾀주머니'란 별명을 얻는 이유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KE831편 기내에서=이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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