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사생활은 공적인 영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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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송 결과에 대해 문화예술계는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미완성 창작물에 대한 소송은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논란이 됐던 창작물은 전작(全作)이 발표된 작품이었다. 문제가 된 이유도 이적성이나 음란성 여부가 대부분이었다.

1965년 남정현의 소설 '분지'는 이적성 때문에, 92년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음란성 때문에 법정에 섰다. 이번처럼 '앞으로 발표될 소설에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이 문제가 된 예는 없었다.

이번 사건이 불거졌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상식 이하의 일"(문학평론가 임헌영) "머릿속에 있는 작가의 생각에 대해 소송을 건 꼴"(문학평론가 방민호) 등의 성토가 잇따랐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실제 사건도 작가 거치면 허구"=공지영씨에게 작가의 가족사를 글로 써 보라고 맨 처음 권했던 이가 한국문학평론가협회장을 지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그의 입장은 단호했다.

"사회적 공인에게, 특히 작가에게는 자신의 사적인 생활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여야 할, 다시 말해 작품으로써 일반인과 공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실명으로 써도 일단 작품으로 발표되면 실화가 아니라 소설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실제 사건도 작가의 예술적 과정을 거치면 허구로 바뀌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문화예술 창작물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생산된 것이다."

소설가 이경자씨는 "소설은 소설가의 삶을 소재로 삼았다 하더라도 체험수기와 다르며 또한 달라야 한다"며 "한때 가족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창작을 간섭하고 사전에 제재하려고 한 건 또 다른 폭력이며 특권의식"이라고 단언했다.

◆"작가의 창작의욕 보호돼야"=이번 소송의 가장 큰 문제는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작품을 문제 삼았다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소송은, 본의가 어떻든 간에 작가의 창작열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제로 공지영씨는 전 남편이 가처분 신청을 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그 충격으로 한동안 집필에 몰두하지 못했다. 김동식(인하대 국문과) 교수도 바로 이 문제를 지적했다.

"한국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 사건에 대해 법원이 '일부 장면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결정해 해당 장면이 삭제된 채 상영된 적이 있었다. 이때 법원은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격권도 중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화 제작을 마친 뒤의 일이었다. 완성된 창작물이 존재했기 때문에 법적 판단도 가능했던 것이다. 이번 소송이 작가에 대한 사전 검열이나 사전 통제를 의도한 것이란 의심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문화예술 창작물을 법적으로 단속하는 행태가 한국 사회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이런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라며 "이번 법원의 결정을 끝으로 작가의 창작의욕을 훼손하는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이번 사건으로 작가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며 작가를 걱정했고, 원로 소설가 박완서씨는 평소에 아끼던 후배 작가에게 애정이 듬뿍 담긴 한마디를 건넸다.

"마음 상하지 말고…, 소신대로 적어라."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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