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외길 55년… 전업작가 선구자/작고한 정비석씨 생애와 문학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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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54년 소설 『자유부인』으로 대중적 명성
『내게 있어서 소설은 진실을 담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내 스스로 내가 「대중작가」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긴다.』
19일 타계한 작가 정비석씨는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된다」는 이야기꾼 기질로 55년동안 창작에만 몰두한 전문문인이다. 일제하 문필활동을 시작했던 문인들이 해방후 대학강단·언론·출판활동을 펴며 작품활동을 겸업했던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정씨는 창작에만 전념해온 전업작가였다.
1932년 일본의 니혼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문단에 뛰어든 정씨는 1936년 단편 『졸곡제』,이듬해 단편 『성황당』이 각각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입선,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정씨는 해방전까지 1백편 가량의 단편을 발표하며 남녀간의 애정을 주축으로 건강한 토속적 삶을 형상화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41년 장편 『청춘의 윤리』를 발표하면서부터 애정문제를 세태와 결부시켜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된다. 특히 54년 서울신문에 『자유부인』을 연재하면서부터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유부녀의 자유분방한 성모럴묘사로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대중작가로서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
『자유부인』은 단행본으로 출간돼 7만여부가 팔려나가 소설의 대중화를 예고해준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자유부인』의 대중적 성공은 단순히 애정이나 통속성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해방후 서구자유주의 물결로 조성된 사치와 허영의 풍속도를 묘파한 세태풍자에 있었다는 것이 문단의 평가다.
『자유부인』으로 대중적 명성을 얻은 정씨는 이후 각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며 순수한 원고료로만 가계를 꾸려나가 작품만 잘쓰면 다른 수입없이 소설가로서만도 살아갈 수 있다는 본격적인 전업작가 시대를 열었다.
『작가의 최고의 영예는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이라 밝힌 정씨는 고희를 넘긴 80년대 이후에도 『여수』『소설 손자병법』『김삿갓 풍류기행』등 단행본으로 따지면 14권분량이나 되는 작품을 각 일간지에 연재하며 전업작가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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