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미국 비자 면제 독이 될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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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얼마 전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러 주제를 거쳐 비자 문제로 넘어오자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 옆에 있던 다른 외교관이 거들었다. "한국은 정말 이상한 나라인 것 같아요. 보통 못사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러 미국으로 몰려듭니다.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사람들이 그런 부류죠. 그런데 한국에선 오히려 여유있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가려고 해요. 여기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남의 나라로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 제 나라에서 원하는 걸 찾지 못할 때 다른 나라로 떠나는 거라고. 미국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충족할 수 없는 무엇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 무엇 중 대표적인 게 '고품질의 교육'이다. 미 국무부 집계에 따르면 2005년 미국 내 한국 대학생(대학원생 포함)은 5만3358명으로, 인도(8만466명)와 중국(6만2123명)에 이어 3위였다. 지난해 다시 5500여 명이 늘어나 미국 유학생 중 한국 대학생 비율은 가볍게 10%를 넘어섰다. 여기에 초.중.고 유학생까지 합치면 한국은 단연 1등이다. 지옥이란 험한 말이 교육 앞에 자연스럽게 붙는 풍토를 뜯어고치지 못하는 한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내리사랑에서 단연 세계 최고인 이 땅의 부모들은 미국으로 학비만 부치지 않는다. 몸소 자식들의 기숙사와 하숙집을 보러 간다. 미국에 가면 관광도 하고 골프도 치고, 국내에 비해 월등히 싼 명품 브랜드 제품도 몇 가지 사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가진 사람들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가서 돈을 쓰면 한국 경제엔 마이너스고, 미국 경제엔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뺏는 것도 아니고. 돈을 쓰러 가니 오히려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죠. 이런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이 비자 면제 혜택을 주지 않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은 이미 27개국 국민에게 무(無)비자 입국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경제나 외교, 군사동맹 관계로 볼 때 한국을 거기에 포함하지 않는 건 쉽게 납득이 안 됩니다."

이 말에 그들도 맞장구쳤다. "우리도 한국인들이 미국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은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비자 면제 기준에 아직 약간 부족합니다. 비자 거부율이 3% 아래여야 하는데 현재 한국은 이걸 조금 웃돕니다."

그들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실 몇 달 전 부시 대통령은 '3% 기준'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자거부율이 3%를 조금 넘더라도 전자여권을 사용하는 나라에 대해선 비자 면제 방안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것이죠. 전자여권은 여러 가지 개인정보를 담은 칩을 장착한 것인데, 이걸로 불법 입국과 관련된 문제를 대부분 대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미 전자여권을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인들은 비자 없이 미국에 갈 수 있을 겁니다."

얘기를 듣고 보니 미국 비자 면제 시점이 임박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또 다른 걱정이 생겨났다. 학교 자율권을 거부하는 교육인적자원부가 '해체'되기 전에 비자가 면제된다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무비자 입국이 허용되면 교육 관련 미국행 인파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가뜩이나 시원찮은 내수 경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심상복 국제부문 에디터